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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글라스 아저씨
팔짱 끼기
by
Essie
May 4. 2024
많은 승객들 중 딱 한 명
검은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가 있었다.
이 새벽, 무려 지하철에서 웬 선글라스?
가장 오래 살던, 정든 우리 동네 М. 1905 Года©essie
모스크바에서 지하철을 탄 횟수가 너무 많아서인지
떠난 지 십 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우리나라보다
이 곳 메트로가 금세 다시 익숙하게 다가왔다.
어떤 지점에서 어떤 칸을 타는지까지도 생각이 아닌
몸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디테일 감은 많이 잊었다.
듣기로는 북한도 러시아랑 비슷하게 해 놨다던데....
"1905년" 역에서 지하철 타기
절대 잊지 않을 줄 알았던
교회
주소를 잊는 바람에
인터넷에서 찾아갔다. 이 쉬운 주소마저 잊다니.
모스크바 온누리교회는 새벽 6시 반 매일 집을 나와
아침 7시 기도 모임을 다니던 행복한 장소였다.
여기는 지하철이 빠르다. 그보다, 놓쳐도
미련 없다.
재어보진 않았지만 1-2분이면 또 오니까.
그래서
한국 지하철 시간표에 갑갑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사랑받던 미녀와 행복하던 남자,1905년 메트로 ©essie
새 열차는 한국처럼 조신하게 닫히지만, 오리지널
모스크바 메트로 열차는 닫힐 때 절대 타면 안 됐다.
왜냐하면 열차 문이 식겁할 만큼
세게
닫히기 때문.
끼이면 죽을 것 같을 만큼 인정사정없이 강력했고,
어차피 다음 열차가 숨 몇 번 고르면 올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열차 문도, 러시아 아저씨가
있으면 안전했다. 자주 오는 만큼 정차 역시 짧은데
그 사이 못 탄 여성 승객이 타던 중 문 닫히는 찰나,
커다란 양팔로 그 문을 영웅처럼 붙잡아 제지하는
모습을 가끔 목격했다. 사람이 들어와 문을 놓으면
진짜, 그야말로, 반동마저 일 듯 쾅! 하고 닫혔다.
저 문 붙들 생각을 하다니, 아니 문과 싸울 생각을
하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돼서 잊을 수 없었다.
나는 처음 보는 디자인의 메트로 열차 ©essie
아마 러시아의 모든 문들
이 그렇지만 메트로 역도
문이 여러 개이고 무척 무거운 편이다. 난방이 아주
잘 되는
만큼, 문도 추위를 막기 위해 그런 것 같다.
나 같은 여자들은 메트로 입구 문 두 개를 지날 때
힘을 덜 쓰는 요령이 생기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앞사람을 따라가며 문에 반동이 오는 타이밍에
조금만 밀고 들어가는 것이고, 혹은 그냥 몸으로
밀고 들어갈 때도 많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편한 것은 바로 앞의 남자가 문을 붙잡아 주는 것.
러시아 남자들은 여자가 있으면 99% 문을 열고
붙잡아
먼저 들어가게 한 뒤, 그다음에 들어온다.
타이밍상 먼저 들어왔다면, 거기에서 문을 붙잡고
여성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준다. 생활화 돼있다.
이 문화에 익숙하던 내가 한국에서, 먼저 들어가고
문을 안 붙잡아주는 남성을 보면
조금은 당황했던
기간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니 당연했던 걸 텐데
그렇게 나라마다 문화의 다름이 극명히 드러났다.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짧은 Circle 환승구간 ©essie
새벽 6시 반, 교회에 가기 위해 들어온 지하철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중년 남성이 눈에 띄었다.
이 시간에, 무려 지하철에서
웬
선글라스?!?
알고 보니 한 손에 스틱을 든 시각 장애인이었다.
선글라스 아저씨가 환승하시던 지하철 역 내부
М. баррикадная ©essie
그시간 출근길은
만원에 지하 통로는 어마어마,
에스컬레이터도
빠르고 깊은데
(전쟁대피시설)
홀로 어떻게 다니시나, 괜찮나
싶어 쳐다보았다.
돕고 싶었으나
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걸인이면 루블이라도 드릴 텐데 차림새가 아주
말끔하고
목적지도 정확해 보여
, 오히려
자칫
실례될 수 있고 여성도 아니라 결국
지나쳐왔다.
모스크바 지하철의 흔한 에스컬레이터
열차간 텀이 짧아 다시 마주칠 확률은
적은
데
며칠 후 새벽, 선글라스 아저씨와 또 마주쳤다.
쳐다보니, 어떤 여자가 아저씨에게
무어라 말했고
아저씨가 스틱을 접으셨다. 그러자 그녀가 아저씨
팔짱을 끼고 함께 걷는 것이었다.
'아, 저렇게 하는 거구나!'
나는 감탄했다. 모르는 방법을 배운 기분이었다.
아저씨 혼자 다닐 수 있지만 아주 보기 좋아 보였다.
훨씬 빨리 갈 수 있고, 조금 더 안심할 수 있으니까.
한 주쯤 지났을까. 메트로에서 아저씨를 보았다!
마치 아는 사람을 발견한 듯 반갑기까지 했다.
아직 돕는 사람도 없고 다들 출근 중 바빠 보여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재빨리
다가갔다.
- 도와드릴까요?
지난번 여성을 본 덕에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 네, 감사합니다.
정중한 감사와 함께 살짝 내민 아저씨의
팔에
팔짱을 끼고 목적지를 확인한 뒤 함께 걸었다.
어차피 내 방향과 같았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방법을 알려준 그 여성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아저씨는 늘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눈썰미가 부족해 차림새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선글라스는 어렴풋 기억한다.
우리가 그를 돕는다기보다,
그가 우리에게 주는 '기회' 같았다.
행복할 수 있는 기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기회,
도울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교회에 갈 때마다
혹시 아저씨가 계실까 두리번거렸고,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
면 그렇게 반가웠다.
나중에는 한동안 보이지 않으시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일정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지은지 오래된 모스크바 지하철의 흔한 내부 ©essie
십여
년 만에 같은 노선 메트로에 들어오니
저절로 선글라스 아저씨도 떠올랐다.
'잘 계실까..?'
내 눈썰미가 아무리 최하 수준으로 없다지만
눈을 감은 세계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지하철을
보지
않고 이용하는 것일까!
그들은 어쩌면 천재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저씨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환승 계단에서
무거운 짐을 든 채 지팡이를 짚으며 내려오느라
애쓰시는 할머니를 보았다. 내가 다가가기도 전,
한 여성이 순식간에
짐가방을 대신
들더니 함께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이 순간을 담고 싶었다.
지나가다 할머니의 짐을 대신 들고 발맞추어 내려오는 승객
옛날,
시간에 쫓겨 마구 뛰다 급히 탄 메트로에서
헉헉대자, 승객들이 걱정스레 쳐다보며 물어왔다.
- 어디 안
좋아요
? 도움 필요해요? 도와드릴게요
민망하게도 호흡곤란인 줄
알았는지 괜찮다는데도
심지어
자기 사탕을 꺼내주었다.
사탕 안 먹는데..
러시아인들은 살짝만 부딪혀도 바로 "죄송합니다"
앞에 사람이 있어 지나갈 때면 꼭 "실례합니다"
조그만 일에도 고마울 때면 "감사합니다"라고
표현하는데 전혀 인색하지 않다. 오히려 넉넉하다.
대중교통에서의 예의문화가 200% 탑재되어
있고
90% 이상이 우측통행을
하여 이동에도 편리하다.
다시 간
모스크바 메트로는
, 여전한 열차소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만큼은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였다.
М. Краснопресненская ©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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