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ssie May 04. 2024

선글라스 아저씨

팔짱 끼기

많은 승객들 중 딱 한 명
검은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가 있었다.

이 새벽, 무려 지하철에서 웬 선글라스?


가장 오래 살던, 정든 우리 동네 М. 1905 Года©essie


모스크바에서 지하철을 탄 횟수가 너무 많아서인지

떠난 지 십 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우리나라보다

곳 메트로가 금세 다시 익숙하게 다가왔다.


어떤 지점에서 어떤 칸을 타는지까지도 생각이 아닌

몸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디테일 감은 많이 잊었다.

듣기로는 북한도 러시아랑 비슷하게 해 놨다던데....

"1905년" 역에서 지하철 타기

절대 잊지 않을 줄 알았던 교회 주소를 잊는 바람에

인터넷에서 찾아갔다. 이 쉬운 주소마저 잊다니.


모스크바 온누리교회 새벽 6시 반 매일 집을 나와

아침 7시 기도 모임을 다니던 행복한 장소였다.


여기는 지하철이 빠르다. 그보다, 놓쳐도 미련 없다.

어보진 않았지만 1-2분이면 또 오니까. 그래서

한국 지하철 시간표에 갑갑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사랑받던 미녀와 행복하던 남자,1905년 메트로 ©essie

새 열차는 한국처럼 조신하게 닫히지만, 오리지널

모스크바 메트로 열차는 닫힐 때 절대 타면 안 됐다.

왜냐하면 열차 문이 식겁할 만큼 세게 닫히기 때문.

끼이면 죽을 것 같을 만큼 인정사정없이 강력했고,

어차피 다음 열차가 숨 몇 번 고르면 올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열차 문도, 러시아 아저씨가

있으면 안전했다. 자주 오는 만큼 정차 역시 짧은데

그 사이 못 탄 여성 승객이 타던 중 문 닫히는 찰나,

커다란 양팔로 그 문을 영웅처럼 붙잡아 제지하는

모습을 가끔 목격했다. 사람이 들어와 문을 놓으면

진짜, 그야말로, 반동마저 일 듯 쾅! 하고 닫혔다.


저 문 붙들 생각을 하다니, 아니 문과 싸울 생각을

하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돼서 잊을 수 없었다.

나는 처음 보는 디자인의 메트로 열차 ©essie

아마 러시아의 모든 문들이 그렇지만 메트로 역도

문이 여러 개이고 무척 무거운 편이다. 난방이 아주

잘 되는 만큼, 문도 추위를 막기 위해 그런 것 같다.


나 같은 여자들은 메트로 입구 문 두 개를 지날 때

힘을 덜 쓰는 요령이 생기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앞사람을 따라가며 문에 반동이 오는 타이밍에

조금만 밀고 들어가는 것이고, 혹은 그냥 몸으로

밀고 들어갈 때도 많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편한 것은 바로 앞의 남자가 문을 붙잡아 주는 것.


러시아 남자들은 여자가 있으면 99% 문을 열고

붙잡아 먼저 들어가게 한 뒤, 그다음에 들어온다.

타이밍상 먼저 들어왔다면, 거기에서 문을 붙잡고

여성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준다. 생활화 돼있다.


이 문화에 익숙하던 내가 한국에서, 먼저 들어가고

문을 안 붙잡아주는 남성을 보면 조금은 당황했던

기간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니 당연했던 걸 텐데

그렇게 나라마다 문화의 다름이 극명히 드러났다.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짧은 Circle 환승구간 ©essie

새벽 6시 반, 교회에 가기 위해 들어온 하철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중년 남성이 눈에 띄었다.

이 시간에, 무려 지하철에서  선글라스?!?


알고 보니 한 손에 스틱을 든 시각 장애인이었다.

선글라스 아저씨가 환승하시던 지하철 역 내부
М. баррикадная ©essie


그시간 출근길은 만원에 지하 통로는 어마어마,

에스컬레이터도 빠르고 깊은데 (전쟁대피시설)

홀로 어떻게 다니시나, 괜찮나 싶어 쳐다보았다.

돕고 싶었으나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걸인이면 루블이라도 드릴 텐데 차림새가 아주

말끔하목적지도 정확해 보여, 오히려 자칫

실례될 수 있고 여성도 아니라 결국 지나쳐왔다.


모스크바 지하철의 흔한 에스컬레이터


열차간 텀이 짧아 다시 마주칠 확률은 적은

며칠 후 새벽, 선글라스 아저씨와 또 마주쳤다.

쳐다보니, 어떤 여자가 아저씨에게 무어라 말했고

아저씨가 스틱을 접으셨다. 그러자 그녀가 아저씨

팔짱을 끼고 함께 걷는 것이었다.


'아, 저렇게 하는 거구나!'


나는 감탄했다. 모르는 방법을 배운 기분이었다.

아저씨 혼자 다닐 수 있지만 아주 보기 좋아 보였다.

훨씬 빨리 갈 수 있고, 조금 더 안심할 수 있으니까.


한 주쯤 지났을까. 메트로에서 아저씨를 보았다!

마치 아는 사람을 발견한  반갑기까지 했다.

아직 돕는 사람도 없고 다들 출근 중 바빠 보여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재빨리 다가갔다.


- 도와드릴까요?


지난번 여성을 본 덕에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 네, 감사합니다.


정중한 감사와 함께 살짝 내민 아저씨의 팔에

팔짱을 끼고 목적지를 확인한 뒤 함께 걸었다.

어차피 내 방향과 같았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방법을 알려준 그 여성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아저씨는 늘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눈썰미가 부족해 차림새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선글라스는 어렴풋 기억한다.


우리가 그를 돕는다기보다,

그가 우리에게 주는 '기회' 같았다.


행복할 수 있는 기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기회,

도울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교회에 갈 때마다

혹시 아저씨가 계실까 두리번거렸고,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 그렇게 반가웠다.

나중에는 한동안 보이지 않으시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일정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지은지 오래된 모스크바 지하철의 흔한 내부 ©essie


십여 년 만에 같은 노선 메트로에 들어오니

저절로 선글라스 아저씨도 떠올랐다.


'잘 계실까..?'


 눈썰미가 아무리 최하 수준으로 없다지만

눈을 감은 세계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지하철을 보지 않고 이용하는 것일까!

그들은 어쩌면 천재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저씨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환승 계단에서

거운 짐든 채 지팡이를 짚으며 내려오느라

애쓰시는 할머니를 보았다. 내가 다가가기도 ,

한 여성이 순식간에 짐가방을 대신 들더니 함께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이 순간을 담고 싶었다.

지나가다 할머니의 짐을 대신 들고 발맞추어 내려오는 승객


옛날, 시간에 쫓겨 마구 뛰다 급히 탄 메트로에서

헉헉대자, 승객들걱정스레 쳐다보며 물어왔다.


- 어디 안 좋아요? 도움 필요해요? 도와드릴게요


민망하게도 호흡곤란인 줄 알았는지 괜찮다는데도

심지어 자기 사탕을 꺼내주었다. 사탕 안 먹는데..


러시아인들은 살짝만 부딪혀도 바로 "죄송합니다"

앞에 사람이 있어 지나갈 때면 꼭 "실례합니다"

조그만 일에도 고마울 때면 "감사합니다"라고

표현하는데 전혀 인색하지 않다. 오히려 넉넉하다.


대중교통에서의 예의문화가 200% 탑재되어 있고

90% 이상이 우측통행을 하여 이동에도 편리하다.


다시 간 모스크바 메트로는, 여전한 열차소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만큼은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였다.


М. Краснопресненская ©essie
작가의 이전글 일단 잡고 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