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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May 06. 2024

무서운 남자

당신이 아닙니다

- 얘, 너 어떤 남자가
  제일 무서운 남자인 줄 아니!?

혼내듯 묻는 분은 한인교회 목사님이셨다.

- 어떤 남자인데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런 대답을 상상도 못 했다.

그때 들은 말이 뇌리에 꽂혔고, 맞는 것 같다고

인정하게 되어갔던 듯하다.


나는 그 사람이 되게 순수하다고 생각(착각)했다.

예전의 베프 남사친은 말도 빙빙 돌려서만 했는데

이 인물은 너무 솔직한 나머지 당돌하기까지 했다.


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문자와 전화가 왔는데

대화를 잠시 하다가, "이제 연습하세요" 그랬더니


- 저랑 통화하기 싫습니까?


이런 식이었다. ㅋㅋㅋㅋㅋ 너무 웃겼다 ㅋㅋㅋ

그렇게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학교에 언제 오냐고 자꾸 묻는데 안 가르쳐주자


- 저랑 만나기 싫어서 그러는 겁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안한데 너무 웃겨 ㅋㅋ


사정상 연락을 끊고자 유심을 바꾼 적 있는데

나중에 보면 이런 음성 메시지가 여러 개 있고.


- 보고 싶습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OO씨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자기 심정을 말로, 그것도 무려

아주 정중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처음 보아서인지

솔직히 한편으로 너무 웃기기도 했다. (미안합..)



사님은 마치 약간 화가 나신


- 유부남이나 다를 바 없는 남자가! 어디서 그런..

- 네? 결혼을 안 했는데 왜 유부남이에요..?

- 여자친구 있다며!

- 아, 네. 그럴 거예요.

- 그럼 유부남이나 마찬가지지!

- 아니 그게 무슨..

- OO 형제님, 맞죠? 제 말? OO나라에 여자친구가

   있는데, 이미 유부남이나 마찬가지죠?

- 아, 네!! 그럼요! 유부남입니다!


ㅋㅋㅋㅋㅋ 두 분의 환상적인 호흡에 또 웃었다.


- 아 풉.. 그거랑은 좀 다르죠.. 그리고 아무튼 제가

  사귈 것도 아닌데 여자친구 여부도 별 상관없고.

  선 확실히 지키면 되는데 그렇게 몰 것 까지야..

  음악적으로 소리가 너무 좋거든요, 순수해서 그렇..


- 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남자가 누군지 아니!?


좋은 음악 친구가 될 수 있다 믿던 이상주의자에게

목소리 높여 의미심장하게 하셨던 말씀.


"가장 무서운 남자는 바로 솔직한 남자라고!"


- 순수한 쪽은 오히려 옛날 네 그 친구야!

  순수하기는 개뿔! 진짜 너~무 모른다! 답답해!

  지금 걔는 프로야! 아주 반대로 생각하고 있네.

   보통 아니야. 너 안 되겠다, 심카드 내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목사님의 말이 맞을지도.

아니, 맞았던 듯하다. 뭐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솔직한 남자'를 나로부터 차단시키기 위해

무려 유심을 압수하셔서 번호가 바뀌게 되었다.ㅋㅋ


솔직함과 진실함을 추구하던 나에게

사귀고 말고는 별로 중요치 않던 나에게

이제 솔직함만이 최선이 아님을 알려준 걸까.


10대 중반, 모든 사람이 결혼을 하지 않고

서로가 인류애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것도 뭔가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본

이 말도 안 되는 비현실 이상주의자에게


현실은 내 생각만큼 녹록지 않음을 알려주던

그분의 한마디가 아직도 가끔 떠오르곤 한다.


감사합니다...


여자베프의, 남자베프를 향한 귀여운 질투문자
남자와 친구로만 지내던 나도 누군가에게는 한편
역대급 빌런이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에게 똑같이 소중했던 남녀 베프 둘 중, 그 시간
남 베프 전화가 와서 여 베프 전화를 못 받았더니
질투로 보내온 여자 베프의 옛 문자. 바람둥이라니
맙소사 ㅋㅋㅋㅋ 왜인지, 애정하는 문자가 되었다.

이제 이 나이대에는,
이상주의적 생각도 소용없음을 하나씩 깨닫는다.
결혼한 친구들과 적당한 거리로 바뀌기도 하고
이제 성별이 남자인 베프 따위 키우지 않는 듯.


이상주의자에게는 반드시

현실주의자가 필요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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