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ssie Jun 15. 2024

서툴러서 사랑받을 수도 있다

두 친구

가끔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한 명은 한국인 여자, 한 명은 일본인 남자.
한국인은 서울대 실기 수석, 재학 중 우리 학교로
유학, 일본인은 영 차이콥스키 콩쿨 입상 이력에
일본 대기업의 후원으로 유학을 왔다.

성격은 어땠냐고? 음악 친구들 중 실력이 좋은데
성격도 정말 손에 꼽았다. 성격이라기보다 인격,
인격보다는 인품이란 말이 어울리는 두 명이었다.

둘 다 내 절친이었는데 둘의 공통점이 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언어능력이 전공 같지 않았다는 점.
보통 음악을 잘하면 귀가 좋아 언어도 기준 이상
잘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두 명은 살짝 예외였다.



일본인 친구


일본친구는 일본 특유의 발음으로 영어와 노어를

간당간당 천천히 했는데, 얘의 룸메가 말하기를,

"걔는 우리나라(일본) 말도 잘 못해. ㅋㅋ"라고..

언어 장애라는 뜻은 아니다! 말재주가 없다 정도.


말재주만 없나, 그건 아니다. 이 친구의 첫인상은

'쟤 뭐야.' 였으니까. 곱슬인 듯한데 일어나 거

한 번 안 보고 나오는 건지 뒷머리가 늘 삐죽했고

사람이 영 시원찮아 보였다. 평소엔 이해하지만

연주회에서는 다르다. 후지던 애도 연주날 만큼은

일단 옷부터 달라지는 게 클래식 음악계의 특징.


그런데 이 녀석(?) 연주 날조차 옷만 바뀌고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쟤 머리 대체 왜 저래?

무대에 적어도 머리는 빗고 나와야 할 거 아니야."

외모에 대해 웬만해서 말 없던 나도 거슬릴 정도.

친해진 뒤 듣게 됐는데 빗어도 뻗친다고 했다.

물만 묻혀도 나을 텐데 그냥 신경 안 쓰는 듯.


어떤 연주날은 검은 양말을 챙겨 나왔는데,

알고 보니 짝짝이에 구멍도 나있다며 웃더라.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대서 힘든 줄 알았는데

부자라고 룸메가 고자질(?)하자, 만일 나 때문에

네 악기 망가지면 난 집을 팔아야 한다 맞받아치던.

술 취해서 룸메 악기를 넘어지게 할 뻔한 적 있다고


어느 기간엔 무소식이길래 바쁘겠거니 했는데

마주친 내게 "폰을 일주일째 못 찾고 있다"라고

했다. 놀라서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물어보자

방에서 잃어버렸다고... 무조건 방이라고.......


기숙사 방은 열 걸음 남짓 평수. 왜 못 찾냐니

네가 우리 방에 안 와봐서 하는 말이라고...

친구 방은 기숙사에서 이미 소문이 나긴 했다.


학생 대부분이 무서워하던 한 책임자가 하루는

뭔가 전하고자 노크하고 그 방에 들어갔는데...

몇 걸음 딛고, 다음 스텝이 떼어지지 않았다고.


"왜?"

"왜냐하면..."

"??"

"바닥에 꿀을 밟았거든."


ㅋㅋㅋㅋㅋ  그리 좋다고 쌤통이라며

지들끼리 웃던 나의 일본 친구들이 생각난다.

꿀을 방바닥에 흘린 지 일주일 넘었다던가....


울그락 불그락 분노한 채 나갔다던 그녀는

나중에 나를 거의 학부모 급으로 대하면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심지어 나를 호출했다.

나는 그 방에 발 디뎌본 적이 없지만 말이다.



한국인 친구


한국친구는 내가 본 음악가 중 가장 낙천주의자에

속했는데 딱 하루 기죽은 우울한 모습으로 마주쳐

보자마자 물어봤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학교 문 옆 의자에 걸터앉아 시선을 아래로 하며

힘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언어에 재능이 정말 없나 봐...."


알고 보니 러시아어 선생님에게 혼난 것 같았다.

ㅋㅋㅋㅋㅋㅋㅋ 미안한데 너무 웃겼다 ㅋㅋㅋ

친구가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다 보니

그런 걸로 슬퍼하는 것조차 귀여워 웃어버렸다.


실력이 좋으니 다른 외국 콩쿨에서 입상했는데

"심사위원이 나한테 영어 좀 배우라" 했다고..

실력이 좋으면 됐지 뭔 영어 타령을..

다행스럽게도 친구는 다시 늘 낙천 모드였다.


일본 친구야 나와 영어로 대화하고 노어 하는

모습도 자주 보아 어떤지 알지만, 한국 친구는

한국어로만 말하기 때문에 사실 본 적 없었다.



귀여운 외국인


학교에서 마주쳐 반갑게 옆에 앉아 있는데

한국 친구 폰이 울렸다.


"알로?"


러시아 사람인가..?


"응? 음.. 응!"


아~ 한국 사람이구나.


상대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친구의 톤을 듣고

한국인이라고 확신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믿기지 않게도 친구가 러시아어를 이어갔다.


"방금 혹시.. 러시아 사람이랑 통화한 거야?"


"응? 응."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웃어버리고 말았다 ㅋㅋ


"아, 미안해, 너무 웃겨 ㅋㅋㅋㅋㅋ"

"내가 좀 한국말처럼 얘기하지ㅋㅋ"

"어, 처음 봤어. ㅋㅋㅋ 너무 귀엽다 ㅋㅋㅋ"


친구와 키득키득 웃으면서 듣게 된 얘기는,

러시아인들도 자기를 귀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라는 이야기였다. 내가 봐도 귀여운데, 그렇겠다.



호감형 외국인


그러고 보니 그 일본 친구와 있던 일이 떠올랐다.


 글을 읽었다면 이해가 훨씬 빠를 것.

인사는 아무에게나 하지 않는다


기숙사생은 99% 맞은편 마트에서 장을 본다.

일본인 친구 둘과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머리 뻗친 한 명이 뭘 사야 한다길래 나도 사러

같이 들어갔다. 내가 먼저 계산했고, 늘 그랬듯

직원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코드를 찍고 끝냈다.


이제 일본 친구 순서가 되었는데, 어리바리함이

그곳에서조차 나왔다. 계산 중 대화에서 무언가

못 알아들어 지체되고 직원 입장에서 무조건

짜증이 날 차례인데 직원이 친절한 것이었다!


이럴수가! 충격을 받고 계속 지켜보았다.

아직도 그때 받은 놀람의 느낌은 살아있달까..

일본 친구의 어눌한 말투. 착한 바보 느낌의...

직원의 관용적인 태도. 무려 친절하기까지!!!


"와, 마트에서 저렇게 친절한 것 처음 봤다."

"응? 하하 원래 그렇지 않나?"

"역시 다르네. 네가 좋은 사람인 걸 아나 봐."

"아니야, 나 별로 좋은 사람 아니야"

"내가 여기 산 세월이 얼마인데.. 진짜 처음 봄."


대체 그것이 뭘까 여러 번 생각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경계를 풀게 만드는가.


그러고 보니, 처음에 뻗친 머리에 불만 있던 나,

새로운 친구는 딱히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던 나,

일본인 친구 단 한 명도 만들어 본 적 없던 내가

친구로 인정한 첫 일본인이, 바로 이 친구였다.

이성으로 끌리진 않았다. 얘한테 뭐가 있는 거지?



어느 날 다른 한국 가 이런 말을 던졌다.


"언니, 쟤(일본 친구) 착한 것 트릭 같아요."

"응?"

"뭔가, 트릭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말을 잘 못하고, 외국어로 말하니까 더 착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걔도 알고 보면 예민할 거

 아니에요? 피아노를 그렇게 잘 치는데."




트릭이건 아니건,

러시아에서 러시아어가 유창하지 않았던

점이 인간미와 친근함을 발산해 주어

현지인들에게 호의와 사랑을 받았다는 점.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님을 확신하지만

순수한 마음,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면

한두 가지, 아니 많이 뭔가 서툴고 잘 못해도

얼마든 사랑받고 사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아기 때에는 눈만 깜박여도 잘했다 사랑받고

어린이부터 학생까지는 잘 하면 칭찬 받아도

그 다음부터는 점점, '좋은 마음, 좋은 생각'

내공들이 많이 쌓여 훌륭한 인품이 될수록

칭찬과 호감 그리고 존경을 얻는다.


돈과 명예 많은 것이 사랑의 대상은 아니나

신기할 만큼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사람은

어떠한 형태로든 마음을 움직이게 할테니까.


잘 하지 않아도 괜찮다.

당신의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지면 좋겠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당신을 사랑할 존재가

이 세상에 반드시 있다.


내가 계산대에서 버벅거리면 혼난다에 열 표

한국인 친구와 일본인 친구들
매거진의 이전글 무서운 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