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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Nov 06. 2015

그 조종사의 선택

나도 사는 동안 누군가를 살릴 수 있을까

'북한'이란 말이 들어가면 어떤 의미로건 일단 민감해진다. 특히 이런 공개적인 글은 더욱 그러하다. 불필요한 오해의 여지를 제공할 수 있기에. 그래서 더욱 본인은,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법을 지키고 사는 국민 중 하나라는 점을 짚어둔다.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자료 중 하나
안녕하세요


이름 석자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녀는 어렸고 매우 야무졌으며 물론 피아노를 잘 쳤다. 학교로 치자면 내 후배이기도 했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한 번 보고 잊지 못할만큼의 상당한 미인이었고, 아버지는 북한 대사관의 외교관이었다.


한동안은 몰랐다. 우리 교수님께 북한 학생이 생긴 사실을.

어린이가 어른보다 훨씬 더 남한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짧은 경험을 통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그 아이와 웃으며 인사할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내가 남한 사람임을 안 순간 흔들리던 눈동자에 어김없이 비친 공포와 경계심.

어린이를 힘들게 할 생각은 없어 시선을 돌렸다.

장소는 학교가 아닌 교수님 댁이었기에 우리는 한 집 안에 있었고, 어린이의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예쁘다


안면인식장애가 있는듯한 내게 아직까지도 어렴풋 기억에 남을만큼 인상이 마음에 드는 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어린 딸과 다른 눈빛으로 나에게 응답했다.

경계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오히려 그녀도 나를 좀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다.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됐다.




사실 나는, 한국에 사는 탈북자들을 보기 이전에, 아마 '어느 정도 고위층으로, 외국에 일정 기간 나와 살던 여전히 북한인민주의공화국 여권을 가진 사람들'을 꽤 많이 봐왔다. 모스크바에서 그들과 마주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북한에 가 본 지인 교포들과 러시아인들의 경험담, 심지어 625 때 "북한 공산당을 돕는 소련군인"으로 참전한 러시아 할아버지 이야기까지 본의 아니게 직접 들은 기억까지 남아있다. (내 첫 러시아 친구의 할아버지였다.....)


어린 학생이 렛슨을 받는 동안 오고가던 짧은 대화. 나도 나였지만, 그녀 또한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북한에서만 살던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싶을 즈음 침착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저도 예전에, 유학을 했었습니다."


"아, 어디서.."


"저는 ㅇㅇ에서 공부했습니다."


의외의 나라였다. 무슨 공부를 했었는지 거기까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알 수 있었다.

한국 드라마 한 두 개 쯤은 기본으로 본 사람이다.

나와 대화할 때 말투가 딱히 북한적이지(?) 않으며 대화 중 충분히 드러났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렛슨이 끝났고, 다음은 내 차례였다. 서로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어머니와 딸은 집, 즉 북한 대사관으로 돌아갔다. 교수님은 나에게 후배 칭찬을 하셨다.


그 뒤로 딱히 그녀를 본 기억은 없다.

순전히 내가 교수님께 자주가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들의 존재를 잊어버릴 즈음, 나는 귀국을 했다.


역사 박물관에 방문. 스스로 필요를 느껴 자의로 간 박물관은 대한민국 역사 뱍물관이 내 인생에 있어 아무래도 세계 최초.


그 아이는 잘 있나요?


외국에 있는 대한민국 영사관 관련으로 여차여차해 연주를 다녀오게 되었고, 나는 이 때다 싶어 그립던 모스크바를 스탑오버로 티켓을 발권했다.


교수님은 나를 집으로 부르셨다. 그 때의 그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 북한학생이 생각났다.


"그 아이는 잘 있나요? OOO요."


그러자 교수님께서 갑자기 흥분을 하시며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얘, 말도마라, 말도 마.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니?"


조종사의 선택


내 부족한 기억조각들을 대략 맞추어 쓰면 이렇다.

그들은 탈북을 결심했다. 가장인 북한의 외교관은 비밀리에 성공적으로 OO행 티켓 세 장을 끊었고, 그들은 비행기에 탑승, 이륙해 하늘을 한참 날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항 측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비행기를 돌려라. 모스크바로 돌아오라.
그 비행기에 허가받지 않은 북한인들이 있다.


"그래서 돌렸나요?????"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교수님을 쳐다 보았다.


"아니. 돌리지 않았어. 조종사가 그대로 OO로 직항했어."


"맙소사.. 그럼 살은 건가요!"


"어, 살았어, 완전히 극적으로 살게됐어."


"정말 다행이네요!"


"그래, 정말 다행이었지. 조종사가 비행기를 돌려 내려줬으면 셋 다 죽었을거야."


역사박물관의 625 전시관 입구


오만 그리고 방심


남한 땅과 북한 땅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한국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한편으론 방심한다.

그리고 무서운 줄 잘 모른다. 

왜냐하면 직접 혹은 가까이서 어떤 경험을 

자신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어릴 때부터 외국에 나온 나는 상식도 

지식도 역사나 정치까지도 꽝이었고, 

한국 연예인에 대해 오히려 북한 사람이 

나에게 설명해 준 적도 있었다.

교포는 아니고. 그냥 무심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 가지 만큼은 다르다.

나는 북의 체제 아래 살아간다는 것이 어떠한 삶인지 아주, 아주 조금은 피부로 느껴 보았고, 간접경험 했으며, 같이 떨었다. 이것이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매일마다 감사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수 많은 문제들과 수 많은 부정부패, 사건사고, 또 거짓말들과 불법행위, 그 온갖 소란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대한민국 앞에 '개'를, '헬' 따위의 용어를 적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 지인이 부모와 가족, 모든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기관총과 화염 방사기로 몸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 있는가. 만일 그게 당신의 지인이라면, 가족이라면, 혹은 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어떤 분노를 표할 것인가.


그 일을 행한 주도자가 '국가'였고 '지도자'였다면 당신은 어떤 정의감으로 어떤 항의를 해낼 것인가.

지금처럼 인터넷 기사에 댓글과 비공감으로 반항해 볼 것인가. SNS에 '지도자'와 국가를 비판할 건가. 시내 한 가운데에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할 건가.


아니, 당신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북한에서 일반인이 댓글을 달 수 있는 기사나, 나라 정치에 대한 내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개 온,오프라인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만일 피켓을 들고 나간다면, 곧 죽는것과 같은 의미니까.



오직 산 자만이

그러니 댓글 달지 마시오 비추 누르지 마시오 정부가 하는 일에 다 동의 하시오 고마운 줄이나 아시오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모든 분이 아실 터이고...


모든 문제는 일단 '살아 있을 때' 존재한다.

그것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도 죽임을 당했다.

부모 가족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졌으나

'그 누구도' 지도자와 조국을 원망할 수 없었다.

전 세계 국기 중 가장 아름다운 우리나라 태극기

그래서 나는 오늘도 슬퍼하며 감사한다.

우리나라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비판하는 만큼 반드시 나라를 위해 헌신과 희생, 사랑을 부디 몸소 실천해 주면서 하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었다.


그래야 진짜 사랑 아니겠는가


행동이 없는 말 뿐인 사랑은 사랑이 아닐 것이며

사랑 없는 비판은, 일본인을 비롯한 전 세계 어떤 지나가는 외국인이라도 똑같이 할 수 있는 이다.

게다가 말 뿐인 비판만 거세어져 국민이 분열된다면 좋아할 무리는 내부의 적 혹은 우리편 아닌 외국인들 아니겠는가.


그러니 국가를 위해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훌륭한 분들처럼 목숨걸고 우리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자 소리치라. 그런 이들의 외침은 '반드시' 필요하리라 믿는다.

그런 분들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가족의 이름 앞에'개'를 붙이지 않듯. 사랑하는 우리나라의 이름 앞에도 '개'를 붙이지 않을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이런 글을 적어도 되는지 모르겠고, 적지 않는 편이 개인적으로는 훨씬 유익할 것임을 직감하지만...




모스크바 공항으로 돌아가지 않은 기장의 결정과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모두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던 피난민의 생명'을 구해주는 데에 쓰였다.

사람을 살렸다.

부끄럽게도 최근에야 알게 된 메러디스 빅토리호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
위기의 때에 대한민국을 지원한 63개국


그 후배는 잘 있을까?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아직 살아 있을까.

대한민국이, 알게 모르게 공산화 되지 않지 않도록 우리나라 국민들이 지혜롭게 속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계속, 대한민국을 사랑한다 이렇게 자유로이 말하다가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나도 사는동안 누군가를, 살릴 수 있을까.


모든 사진은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에서 찍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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