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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Jul 03. 2024

화받이통

뜻 : 화가 담긴 통 또는 상대가 쏟아내는 화를 받게 된 사람을 일컬음

쓰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일주일 전에도 넘겼다.
그러나 살아있는 한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날 것.
고로, 오늘도 그 일은 단골처럼 나를 찾아왔다.


별 일은 아니다.

문제는 별 일 아닌 것에 화를 낸다는 에 있다.


누가 화를 내는가.

아버지이시다.


왜 화를 내는가.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여러 번 주기도문의 마음으로 기적같이 넘겼으나

오늘은 왜인지 되지도 않을 부탁을 드리고 싶었다.

왜 상식적으로 생각한 것일까? 실수는 반복된다.



썩은 당근


- 아버지, 앞뒤 없이 마구 화를 내시니까 저도

 너무 어려워서요, 썩은 당근을 제가 보낸 것은

 아니잖아요. 저에게 화를 내지 않으셨으면 하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 네가 다 얘기했으면 이제 내가 얘기하마.


아버지는 다시 언성 높여 화를 내셨고 이번에는

일부러 큰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 아버지! 지금 제가 !!! 하는 게 화내는

 거구요, 아까는 저 화 안 냈어요. 그런데 지금

 아버지께서 계속 화를 내시잖아요. 지금 화를

 내시는 게 맞으세요?


- 화낸 거 아니다!!!


- 화 내신 게 아니라고요?


- 어! 화낸 거 아니야!!!


아버지의 목소리는 온통 화였다.

그러나 본인은 화를 낸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여기에서부터 기본적 문제가 발생해 온 것일까.


- 아버지, 지금 말씀하시는 것 누가 들어도 다

 화낸다고 생각할 겁니다.


물론 나의 말이 통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오늘은 지난번처럼 화받이통으로 끝내기 싫었다.


그렇다.

언젠가부터 나는 종종,

아버지의 '화받이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원래 그 화받이통은 주로 엄마였지만 말이다.


나는 본래, 누군가의 화받이통이 될 만큼 훌륭하지

않다. 그러나 보기와 다르게 생각보다 기준 이상

상당한 인내심을 지니기도 했다. 후천적 발달인지

타고난 것인지 모르나 엉뚱한 예로, 모기에 물려도

긁지 않는 태도도 이에 해당한다. 아무리 울어도,

소리 내지 않는 것도 인내심에 해당되나?(아닌 듯)


아무튼 10-20대의 내가 줄곧 아버지를 설득하려

맞서는 듯한 모습을 종종 보였다면, 그 이후의 난

분명 달랐다. 내가 할 일은 설득이 아니었으니까.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해할 필요는 없다. 나는 신이 아니오.

그러나 다르거나 무려 '틀려도' 존중하는 법과

'논리나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순종하는 법'

대하여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게 성경적이다.


자아의 죽음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아가 없다.

아니, 죽었다. (과거완료형을 써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나를 억울하게 해도, 뒤흔들어도,

욕지거리를 해도, 뺨따귀를 때려도 관계가 없다.


힘들겠지만, 휘청하겠지만, 얼얼하겠지만

인간의 중심을 지탱시켜 주는 근본은 굳건하다.


이유는, 죽은 내 자아의 자리에 대신

하나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의 믿음이 살기 때문.


나는 믿음이 없으나, 그의 믿음이 내 안에 산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지금 그것을 경험 중이다.


처음에는 말려들 뻔했다. (마귀의 장난질에)

그러나 그럴 생각이 없다. 왜? 나는 감사하니까.


화를 내는 사람의 속에는 화가 가득하다.

그 화의 동지는 불평과 원망이다.

반대어는 감사이다.


아버지는 당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숨이 안 쉬어져

죽을 것 같다고 하셨다. 내가 어떤 경우에도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에 듣기도 원하지 않는다.


- 아버지! 저는 살 것 같아요!


반대로 이야기하자, 여전히 그는


- 나는 죽을 것 같다고!!! 당근이 말이야, 어?!

 

'병든 것 같은' 당근이 와서 기분이 나쁘고 숨도

못 쉬게 힘들어서 나에게 화를 내고 계셨다.


같은 당근을 어머니께서는 같은 날 나에게

"당근이 좋네~"라고 표현하셨다.


그 당근을 즙으로 마시는 사람은 어머니이다.


아버지는 몇 달에 한 번씩 꼭 새로이 물으시는

질문을 오늘 다시 하셨다.


불평의 근원


- 당근을 내가 여기에서 사면 왜 안 되는지!


3년째라 같은 대답을 유연하게 해야 한다.


- 아버지가 사 오시는 당근은 성장촉진제와

 농약을 넣어서 크고 예쁘고 오래가지만,

 호르몬계열 암을 앓는 엄마가 드시는 것에

 호르몬촉진제 은 당근을 사용할 수 없어

 그렇습니다.


당근은 사과 등과 달리 더욱 그러하다.

작물과 땅, 영양과 독소 상식이 없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앞으로 또 언제일지 모를

아버지의 불평에 같은 설명을 해야겠지..



유기농 당근의 비애


농작물에는 변수가 있다.

지금 같은 여름철은 가장 심하다.


비가 하루종일 왔고

당근은 박스에 밀봉된 채 택배함에 있었다.

택배함은 산길 한가운데에 있다고 보면 되고

바로 옆은 커다란 저수지로, 습하기 그지없다.


아버지는 오후부터 택배함에 있던 당근을

늦은 밤 집으로 가져와 현관 앞에 두셨다.


현관 앞은 바람막이로 덮여 낮에 뜨거워지고

창문도 박스도 닫혀 밤새 당근은 습기에 찼다.


이튿날 연 박스에서 썩어 무른 당근을 발견한

아버지가 화나기 시작했고, 내게 연락하셨다.


썩은 당근을 보냈다는 것에 거의 분노하셨다.

나는 이것이 처음부터 썩었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가정 하에, 당근 상태와, 우리가 박스

개봉한 시간 상황을 파악해야만 했다.


다짜고짜 판매자에게 무조건 항의할 수 없다.

그래서 침착하고, (일부러 더) 상냥히 여쭸다.


- 아버지, 사진 봤는데요, 혹시 당근이 몇 개

무르기만 한 건가요 혹 곰팡이가 폈나요~?


곰팡이는 포자이므로 이야기가 다르나

일부 무른 것이라면 항의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흥분상태였다. 대화가 어려웠다.

그래도 알아야만 해서 다시 여쭈어 보았다.


- 아버지, 당근이 일부만 물렀나요? 혹시

 물에 다 담그신 건가요?


- 사진 봤잖니! 썩은 걸 보내다니!!


물에 담그셨는지 끝까지 알려주지 않으셨다.

이러시면 반품환불 가능 여부를 알 수 없다.

내가 판매자가 된 기분이었다.


호통치시는 아버지께 꼭 알려야 했다.


- 아버지, 지금 여름이라 당근이 잘 썩을 수

 있는데요, 오는 동안 썩거나 택배를 바로

 집에 가져오지 않으면 썩는 경우도 있..


- 당근이 다 썩었다고!!!! 썩은 걸 보냈다고!


아버지는 이때부터 컨트롤이 불가하셨다.

나중에 깨달았는데, 당근이 썩은 것이 바로

자기가 늦게 가져왔기 때문이라는 '모함'을

받은 기분이셨던 듯하다.


흥분한 아버지께 질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끝까지 듣지 않으시니까.


- 상황을 알려주셔야 제가 처리를 할 수..


- 내가 이 이상 어떻게 더 설명을 하니!!!?

 어?! 사진 보냈잖아. 사진 보냈는데 내가

 여기서 어떻게 더 설명을 하냐고!!! 끊어라!


나는 썩은 당근을 고객에게 보낸 판매업자,

아버지는 썩은 당근을 받고 빡이 친 고객님.

그래도 나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주문을 보통 내가 한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았다


엄마께 여쭤본다고 하자 엄마도 열받을 테니

안된다셨다. 아니리란 확신이 있어 걸어보자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당근을 확인하신 뒤,

몇 개만 물렀고, 곰팡이는 없는 것 같으며,

결정적으로, 일어나 보니 당근박스가 닫힌 채

현관 앞 내실에 뜨겁게 있더라. 어제 반나절

종일 비 오는 가운데 택배함에 있다 여기서도

습하고 뜨거웠으니 그 사이 무를 수 있겠다,

항의하지 말자, 로 마무리되었다.


아버지는 기분이 너무 나빠, 당근도 엄마가

다 씻겠다고 하셨고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구매처가 문제다!


그러나 아버지는 동의하지 않으셨다.

자신이 사 오는 당근은 그렇게 쉽게 썩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엄마가 아프기 전

10킬로씩 구매한 적 없기 때문이기도 하며,

어떠한 것에 대한 '사실적 이유'나 '과정'을

듣는 것조차 힘들어하시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자신이 비 오는 날 종일 습하게 두었어도,

밤새부터 아침까지 온실에 방치했다 해도,

당근이 썩은 이유에 위의 과정은 들지 않고

오직 판매자가 썩은 당근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와 딸은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서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화가 난 것 같았다.


이 하찮은 당근 이슈의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아버지께 불친절하게 말한 적 없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욱 나긋나긋 정중하려 했으니까.


아버지 때문에 당근이 썩었다고 한 적도 없다.

다만 날씨와 상황상 이미 도착해서 바로 열지

않으면 썩을 수도 있고, 곰팡이가 아니라 일부

버리고 먹으면 되어 그대로 두기로 했다는 걸

이야기하다 다 못했다. 끊으라고 하시니까...


앞으로는 박스를 열어 그늘에라도 두셔야

이 여름에 덜 썩는다는 것도 말씀드렸으나

먹히지 않았다. 애초에 병든 당근이라는 거다.



당근이 뭐길래


어제 받은 당근은 좋다는 어머니의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침부터 받지 못한 아버지의 운명의 전화가

오후에 다시 걸려왔고 불평이 재개된 것이다.


엄마가 좋다고 한 당근을 아버지는 왜

병들었다고 표현하시며 화가 난 것일까.

아버지 눈에는 중국산 당근이 기분 좋을 듯.

(약에 담갔던 당근 수출해서 진짜 오래감)


지난번과 달리

오늘 나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 아버지가 사시는 당근은 농약에 쳐담가서!!!

 잘 안 썩는 거고요!! 그래도 여름엔 썩고요!

 이 당근은 약을 거의 안 해서 빨리 썩습니다!

 아무튼 다른 곳에서 시키겠습니다!


순간 약간 흥분해 일부러 '쳐담그다' 라는

격한 표현을 사용했는데 왠지 위험했다.


엄마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아도..

아버지는 엄마에게 그리고 나에게 정기적으로

'아무 치료도 안 하고 산에만 다녀보면 어떠냐'

와 같은 제안을 종종 반복하시면 나도 반복한다.

같은 대답을...


당근 이슈도 1년 이상이므로 한동안은 일부러

당근을 우리 집에 시켜 내가 10킬로 세척한 뒤

차로 1시간 반 부모님 댁에 가져다 놓기도 했다.

계속 그렇게 하려 했으나 엄마가 극구 말렸다.


아버지의 불평과 원성이 정기적으로 지속되어

옆에 계신 엄마에게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친다면

얼마든지 내가 당근을 다 씻어갈 용의가 있었다.


쉽게 화가 나고 기분이 쉬이 좌지우지 돼버리는

가장의 기분을 위해서라면, 엄마를 위해서라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평생 당근을 내게만

씻어 가져오라 한대도 나는 할 용의가 있었다.



폭탄 박스


당근박스는 폭탄일 수도, 당근일 수도 있는 거다.

화받이통이 엄마가 되지 않은 것은 참 다행이다.

그러나 당근보다 사람의 마음이 귀하지 않은가.

나도 사람이다.


병든 엄마에게 무농약이나 유기농을 보내려는

나의 행동은 아버지께 늘 '지나치고 까다롭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처사에 불과했다.


어쩌면 몸은 엄마가 병들어있지만

아버지는 마음이 병든 것 아닌가 모르겠다.


솔직히, 당근에 문제가 없어도 다른 부분에서

화는 얼마든지 튀어나올 수 있다고 생각된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연관 단어는 ''였으니까.



상식은 해결책이 아니다


살아오면서 아버지와 충돌했던 모든 순간은

'상식'을 적용하여 대화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상식'을 포기했을 때 충돌이 멈추었다.


오늘은 잠시 내가 상식을 적용하려 하였으나

아차 싶어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식뿐 아니라 '사실'(fact)도 해결책은 아니다.


급히 마무리하며 "아버지 감사합니다!" 외치고

그토록 끊기 원하셨던 전화를 나도 끊자마자,

전 같으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거나 눈물 나거나

다음 스텝이 바로 되지 않았겠지만, 이제 달랐다.


바로 주기도문을 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Matt. 6:9-13


재미있는 것은 주기도문 바로 직후 나오는

다음 구절이다.


너희가 사람들에게 그들의 범법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그들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Matt. 6:14-15



효과 만점


주기도문을 반복한 지 3년이 넘은 것 같다.

내공이 쌓인 것일까? 효과가 빨라졌다..!

놀랍게도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고 잠잠했다.


하지만 속에서는 약간의 파동이 있어서

성경에서 '불평'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처음에는 가족 카톡방에 올릴 목적이었다.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이런 구절들을

찾아보니 내가 읽게 되지 않는가. 금세

내 마음은 평온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나는 지금 약간 미소 띠고 있다.

웃기도 한다. 미쳤냐고?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그러므로 나도 남을 용서해야 한다.


아버지가 화내셔 봤자 내가 죽지 않는다.

누가 나를 죽인대도 나는 감사해야 한다.

미쳤냐고? ㅎㅎㅎ 아니다. 다만 진심이다.


왜냐고?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Gal.2:20


당근이 썩었다고 속까지 썩으면 되겠어요?
사람이 만물의 영장인데 하나님의 자녀가,
고작 당근 썩었다고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면
썩은 당근보다 내 마음이 나을 게 무어예요?


라고 말할 수 없었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누구라도

남을 화받이통으로 만들지도 말고,

자신이 화받이통 되지 않으면 좋겠다.


나에게 쏟아진 화쓰레기통에 버렸다.




p.s. 이 글을 다 쓰고나니 아버지로부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메시지가 와있다.

날 뒤흔들 마귀의 계획이 무산돼버리자

아버지도 곧 평정심을 되찾으신 것일까.

화를 내서 미안하다니. 감계무량할 따름.

(하지만 긴장을 풀 수 없으므로 올 여름

당근은 꼭 내가 씻어서 가져다놔야지~)

나도 보통의 인간일 뿐인데 뭐가 다를까.

조금 슬프기도 하지만 오늘도 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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