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먹는 사람이 내 은인일 때
나는 욕을 할 수 없다
나에게는 은인이 한 명 있다.
물론 여러 명 있지만 이 은인은 유학시절 아마
가장 인상 깊고, 가장 고마웠던 귀인과도 같았다.
유학의 시작부터 1여 년간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미성년의 나이에 유학을 결정하면서 한국 학교
자퇴를 하고 비자를 기다리는 사이, 나와 자신의
딸을 데리고 함께 가서 살며 돌보겠다고 약속한
친구 엄마는, 사정이 바뀌었다며 자기 두 자녀와
나를, 자신의 오빠이자 선교사였던 가정에 맡겼다.
선교사님 집에서 탐탁지 않아 하며 태도가 나빠
그들에게 나를 맡겨도 되는가 기로에 선 엄마는
모스크바에 가자마자 사흘을 내리 굶고 기도했다.
결국 선교사님 댁 바로 옆 동에 친구 남매와 나-
3명이 얻어사는 아파트에 집세는 나 혼자 냈고
그 선교사님은 당시 어떤 이유로도 타당치 않은
필요 이상의 금액을 우리 부모님에게서 받다가
1년 뒤, 말없이 준비했던 미국 이민을 가버렸다.
우리 집에서 마이너스 통장 만들어 보낸 돈으로
같이 살던 그 두 명도 그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러시아에 간 지 1년 만에 홀로 남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1년간 선교사님 집에서
시키는 대로, 해주는 대로만 지냈는데 그중 아주
잘못된 것이 바로 통역이었다. 언어 감각이 딱히
부족하지도 않고 아직 청소년이라 금세 배울 텐데
오랫동안 자기 딸을 통역으로 붙여 레슨을 다녀
안 그래도 말 없는데, 듣기만 하는 벙어리가 됐다.
설사 말을 잘했다 하더라도 그 나이, 그 상황에서
스스로 부동산에 연락해 집 구하기는 불가능했다.
한국에 갔다 엄마와 함께 다시 왔다. 그새, 엄마가
한국 공항에서 신기하게 만난 사람의 지인의 딸도
러시아 유학생임을 알게 되어 연락처를 받게 됐다.
전화를 걸어보자, 자기 집 주소를 주며 오라고 했다.
음악학교가 아니라 생소한 동네였다. 나도 모르게
경계심이 든 건, 그간 한편 이용을 당했기 때문일까.
누군가 심히 친절하거나 날 도우려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서 무언가를 가지려 하기 때문일 것 같았다.
하지만 혼자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일단 찾아갔다.
마중 나온 그녀를 실제로 만나보니, 똑똑하고 매우
야무져서, 마치 나보다 한참이나 어른 같았다.
살만한 곳을 소개해 준다기에 고마우면서도 한편
'왜 도와주는 거지?' 싶었다.
그녀의 집에 도착하자, 믿을 수 없게도 무려 직접
만든 탕수육과 카스테라를 내놓아, 깜짝 놀랐다.
'대체 왜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거지..??!'
1년간 큰돈을 받은 선교사님도 해준 적 없었는데
연고 없이 사정만 듣고 집에 불러 상을 차려 주고
자신이 다니는 교회 게스트룸에 살도록 같이 가서
부탁하자니, 이 호의가 심지어 과하게 느껴졌다.
-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나는 아직도 얼어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긴장한 게 보였는지 언니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도, 몇 년 전에는 너 같은 상황이었어.
네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그 말에 참았던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이튿날, 엄마와 나는 그 언니와 한인교회에 가서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 적은 돈을 내고 살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게스트룸이 아니었다면
유학을 중단해야 하는 집안 형편이었다고 하셨다.
그 언니는 잊을 수 없는 은인이고, 귀인이었다.
오빠들 무릎 위에 앉아 놀던 음악학교 친구가
줄곧 내게 그 언니 흉을 볼 때마다 듣기 거북했다.
철없던 나는 은혜 갚을 기회를 스스로 놓치다
어느새 언니는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학교도 다르고 동네도 멀어서, 도움을 받은 뒤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었다. 인사만 한 것 같다.
내가 귀국을 하고 나서,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에
언니에게 주소를 받아내어 작은 선물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뒤, 언니가 대법원 쪽으로 날 불렀다.
왜냐하면 언니는 기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언니를 만날 때마다 가는 동네는 참 생소했다.
러시아에서도, 한국에서도 말이다.
언니가 일하다 짬을 내어 나를 만나는 것이라서
언니 일하는 장소에서 만나게 된 나는, 난생처음
TV에서 언뜻 보던 '검찰'이라는 뒷배경의 무대(?)
그리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기자의 책상도 보았다.
내가 인간이라면 밥 값은 내가 내야 했다. 그러나
그 건물 구내식당에서 먹고, 언니가 가진 뭔가로
다 처리해 버렸다. 이제 카페에서라도 내려고 하자
말뿐 아닌 힘으로까지 밀어붙여 정말인데, 정말로
이길 수 없었다. 그날 나는 돈을 하나도 못 썼다.
아..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꽃다발이라도 안 들고 갔으면 어쩔 뻔했나.
물론 꽃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어쩌다 이 쪽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대법원 옆
검찰 동네의 기자는 너무 힘들지 않냐 묻자,
힘들다며 내게 과정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듣자 하니, 뉴스도 잘 안 보고 정치를 모르는
나조차 무조건 아는 한 유명 언론인과, 오래전
언니가 아직 학생일 때 인연이 된 모양이었다.
나에게 이 언니가 은인이라면,
언니에게는 그 사람이 은인이었을지도.
대한민국에서 꽤 떠들썩한 논란의 인물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알고 보니 이 언니도 못지않게
팬과 안티를 가진 기자로, 당시 법무부 장관과
관련 시끄러운 일도 있었음을 후에 알게 됐다.
개인적으로 나는 좌파 우파라는 말을 싫어하며
문재인을 욕한 적도, 윤석열 욕한 적도, 심지어
북한의 김정은이나 푸틴에 대해서조차 욕한 적
없는 사람이다. 정확한 이유를 지금은 패스한다.
그렇다면 신념이나 소관이 없어서인가, 아니다.
뚜렷하나 개념과 가치관, 판단 기준이 다르다.
< OOO기자, 남파 고정간첩 아닐까요? >
< OOO기자를 응원해 줍시다. 참 기자입니다. >
이렇게 좌에서는 극찬, 우에서는 의심을 하는
기자가 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직종의 꽤 유명했던 한 어른도,
좋은 인품으로 나에게 평균 이상으로 잘했는데
알고 보니 고정간첩으로 의심받는 인물이었다.
생각해 보았다.
그들의 입장을.
그러다 솔직히 깊이 생각하기 어려움을 깨달았다.
그 언니는 나에게 은인이다.
그녀가 잘못을 했건 안 했건 욕먹건 칭송받건
그런 것이 내가 받은 은혜를 바꿀 수는 없었다.
옛 친구가 생각났다.
그녀는 부유하고, 화려한 미모를 가진 여자였다.
- 이건 비밀인데...
- 응?
- 사실, 나 장군님을 만나봤다.
- 어? 누구? 김정일??????
- 응...
- 김정일 실제로 만나봤다고?
- 응, 가까이서, 따로 만나봤다...
- 진짜???
아.. 그래서 그랬구나..
N이버 검색창에 '김정일' 치면 나오는 결과 글에
다른 것보다 유독 김정일 여자관계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그녀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게.
그리고 그 친구는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 내가 직접 만나봤는데, 정말 좋은 분이야.
훌륭하신 분이야.
- 어떤 점이?
- 인품이.. 정말로 너무나 훌륭하신 분이야.
나는 가만히 듣고, 아무 말도 안 했다.
무슨 말을 하겠나, 자기가 직접 만난 김정일의
인품이 훌륭하고 사람이 그렇게 좋다는데.
나는 안 만나봤지 않은가.
일전에 어디에선가 들은 말이 이해가 갔다.
"김정일도 측근에게는 그렇게 잘한다더라"
그러고 보니, 조폭이 예쁜 여자랑 사는 경우
이유가 있다, 그런 말도 얼핏 들은 것 같다.
김정일은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고,
누군가에게는 은인이었을 것이다. 분명하다.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그저 한 집의 가장이 아닌
한 나라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책임이 크겠지.
나는 기자 언니와 연락하지 않고 지내게 되었다.
우리 중 누구도 일부러라기보다는, 그리 되었다.
언니는 언니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방향성에 내가 전부 동의되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그녀는 평생 은인이다.
이것이 내가 어떤 사람을 한마디로 선하다 또는
악하다,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이 일은 잘했다, 이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등의 의견은 있을 수도 있겠으나, 이 사람은 딱
이런 사람이다라는 평가는, 신의 몫일 것이다.
생각이 많은 밤, 그 언니 생각에 글을 적었으나
널리 알리고픈 글은 아니라 정리 없이 적었다.
물론 오늘의 일기에 태그 따위 걸지 않는다.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