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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Jul 08. 2024

상대의 잘못을 잊는 것은 축복이다

기억과 망각의 사이

찾고 싶은 내용이 있어 오래된 계정에 들어갔다가

의도와 무관하게도 의미심장한 이메일을 발견했다.

나에 대한 불만과 본인의 심경이 들어있는 편지로

당시 읽었을 때의 심정만은 기억이 나는데 뭐랄까,


1. 매우 놀랐고

2. 일부는 되돌아볼 수 있었고

3. 어떤 내용은 꽤 처참하였으며

4. 동일한 방식으로 조목조목 나의 할 말을 얹어

 답을 보낼 시 상대가 초토화될 가능성 때문에

 그러지 않고 나만 사과하여 마무리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상대는 내가 유학 때 가장 칭찬해 왔고

무려 우리 가족이 되면 어떨까 라는 생각까지도

해 볼 정도로 좋게 생각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다시 그 편지를 읽어보니,

'와.....' 할 정도로 나도 상처받았겠구나 싶었고

그에 대해 보낸 나의 답신을 읽고서

'와.....' 할 정도로 놀랍도록  잘 참아내었더라.


그때에는 내가 그 대상을 충분히 이길(?) 만큼의

내용들을 여러가지 가지고 있었다. 생각하지 않다

그녀의 글을 몇 번 신중히 읽고 나니 기억도 났고,

심지어 그 불만에조차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왜 같은 맥락의 편지를 쓰지 않았냐고?

나쁘게 '판단하지는' 않았으니까. '이거 뭐지..'

싶은 순간들에도 마음에 담거나 흉보지 않았달까.

그 친구가 편지에도 썼듯, 나를 상당히 따랐었고.


그럼에도 인간은 대단한 동물인지, 문득 건드리니

신기할 정도로 줄줄이 사탕처럼 생각이 다 나더라.

역시 불평과 감사는 하나를 하면 열, 백이 되는 것.


재미있는 사실은,

오늘 잘못 건드린 그 이메일을 다시 읽고 떠올려도

그때처럼은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큼직한 혹은 사소한 몇 가지는 생각날지 몰라도

당시에는 나도 쏠 수 있던 '팩트의 화살다발'이

지금 거의 온데간데없더라는 사실.


이것이 불리한가? 받아칠 명목을 잊어버린 게?


천만에! 이것은 분명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잘못이 일일이 다 기억난다면 나만 괴롭다.

얼마나 감사한가, 나의 기억력이 쇠퇴했음이..!


잘못에 대한 사과는 마땅히 해야했으니 잘 했고,

어려웠을 편지까지 써보낸 상대에 고마웠음에도,

좀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사과만 하고 가만있기엔

분명 억울하고 불합리적인 요소가 많기는 했으나


첫째는 내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사람을 존중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상대에게 같은 화살을 던지지 않을 거라면

내게 꽂힌 화살들을 신속히 빼내어야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방법이 아마 '망각'이었으리라.


0순위에 있던 이유는, 당시 편지에도 적혀있던데,

그 근본적 대상은 사람이 아닌 '다른 영'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 대부분 영을 배제하겠지만.


조금 아쉬운 것은

그 후에 경험한 황당함이나 불쾌함, 착잡한 일

기억 속에 아지랑이처럼 남아버리게 되었다는 것.

그것까지 잊기 어려웠던 이유는, 바로 그로 인해

결국 이 인연을 매듭짓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즉, '문제의 편지'가 나에게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간의 우정을 생각하여 마지막으로 결혼식에서

그녀가 원하던 음악은 맡아준 뒤 끝내자 정했는데

그 과정에서도 참 열심히 참던 기억은 난다.


조금 덜 진실해도 좋지 않을까? 어쩔 땐 말이다.

나란 인간은 어찌나 진실한지(?), 축의금 낼 때

예전의 관계였다면 더 냈을 금액이 아닌, 보통의

관계에서 예의에 맞게 하는 바로 그 금액만 냈다.


그것은 또다른 언어였다.

그녀가 내게 갖춘 태도로서 증명한 관계의 척도.

그 충격을 받아들이고 응답한 의미와도 같았다.


음악을 맡았으니 현 관계의 기준을 넘었을 수도.

그 과정 중 나뿐 아닌 다른 친구도 참는 걸 봤다.


결혼식 이후, 걸려온 그녀의 전화는 나의 결정이

올바름을 확인시켜 주는 도구로 자리매김 했다.

배려하느라 연락 끊은 경우는 아마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서.


나중에 돌아보니 그녀에게는, 내가 전혀 몰랐던

열등감이 부정적 요소로도 작용했다. 나와 달리

또한 체면과 이미지도 자신에게 중요했다는 걸

내가 알았더라면 그 부분에 신경을 써 줬을텐데.


손가락에 상처가 있으면 물만 닿아도 아픈 법.

소금물은 오죽할까만은, 누군가에게 소금물은

자주 사용하는 도구이다. 그 편지는 다시 보니

더욱, 인간의 악함과 약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상대가 나에게 겉과 속이 다르게 대할 때

측근, 즉 가까운 사람으로서 그러려 한다면

일정 거리 멀어지기를 권고한 경험이 있다.


그러고 보니 마침 상대가 바로 이 친구였다.

아무리 친절히 대해도 나의 눈에는 보였기에...

눈썰미 없는 대신, 보이지 않는  잘 보는 나를

오래 속이기 어려운 법. 나와 가까이 지내려거든

진실되 대하고, 아니라면 지나가며 인사 하는

사이로 지내도록 하자. 그래도 나는 널 좋게 본다

그러 울며 사과하던, 순수했던 모습이 아른하다.

(그러고보니 그때도 교회에서 억울한 일 겪었고

후에 장본인 남자 어른이 무려 몇 달동안 사과함..)


매사 조금 더 상냥하고 조심스러웠더라면

많은 부분에서 오해를 줄일 순 있었겠지만

하나님이 보셨을 때 어떨는지는 알 수 없다.

앞에선 웃고 속으론 원망한   아니고,

어차피 육과 혼만 생각하면 한계가 있거니와

상대가 괜찮다고 나까지 괜찮단 보장도 없다.

사람이란 게 그렇다 보니.


아주 만일 상대에게 잘못을 단 하나도 안 했어도

(잘못할 기회가 없는 대상이 있었음. 안 만나서)

내 존재 자체를 싫어하고 정신적 피해를 봤다면

(지가 좋아한 남자가 자기를 차고 나를 좋아했음)

날 바퀴벌레 보듯 하는 여자에게 사과하던 것이

나의 가치관이다. (나 때문에 불쾌했으니 미안함)

지는 사귀기라도 했고 난 안 사귀었어도 말이다.


그러니 조목조목 써 보낸 상대에게 뭐라 했겠나.

정말 미안하다.

핵심은 그거지...



따져도 유익하지 않은 경우가 더러 있다.

아니, 사실 그런 경우가 훨씬 많지 않나.


따질 것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하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그의 영광이다.


오해 또는 상처를 풀기 위해 꺼내는 행동

훌륭한 방법이나, 전혀 다른 결정적 이유로

'그녀와 새로운 가정을 위해' 연락을 끊었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배려였던 것 같다.


 없는 사람이 있겠냐만은

많은 것을 망각한 나에게 그녀는 천만다행히

'좋은 점이 훨씬 많은'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사실이었든 아니었든 어찌됐든,

내가 그렇게 남기고 싶었을지도.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고

용서는 신이 주신 특권이다.



어떤 신이 주와 같으니이까?
주는 불법을 용서하시고
자신의 상속 백성 중 남은 자들의
범죄를 넘어가 주시나이다.
그분께서는 긍휼을 기뻐하시므로
분노를 영원토록 품지 아니하시나니
그분께서 다시 돌이키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 불법을 누르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바다 깊은 곳에
던지시리로다. Micha 7: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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