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꿈을 꾸고 깜짝 놀라 깨자마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 후,
성경을 펴고 여러 가지 말씀을 찾고는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이른아침이었다.
아버지께 알리고, 기도를 주고 받았고
엄마께, 꿈과 성경말씀 내용을 나누었다.
어제 엄마가 힘들어 하며 일찍 누웠다며
전화하시던 아버지 걱정이 무색할 만큼
엄마는 힘차고 밝은 아멘을 연신 외쳤다.
"방금 네가 읽어 준 성경 말씀을 전부 다
나한테 다시 보내 줘. 이사야서 있지, 그
말씀 듣는데, 나한테 딱, 왔어. 딱, 왔어.
듣는데 눈물이 나더라고. 힘이 나~!"
오늘 아침 엄마에게 보내준 메모 오늘로 같은 꿈이 두 번째,
같은 내용, 엄마의 꿈까지 합치면 세 번.
반복 된다는 것은 강도를 나타내며
확인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이다.
진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며
접근은, 깨어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티빙 앱을 지웠다. 이 정도 꿈을 꾸고도
외면한다면 필시 피눈물을 흘릴 것이기에.
엄마 생명이 걸린 사안이므로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기도할 수 밖에 없겠다.
여전히 기회를 주시고 나를 기다려 주신
그 인내와 긍휼은 진정 '신의 영역'이다.
위는 오늘 이른 아침에 적어둔 글이다.
오후가 되는 동안 하루를 보내며 별 것도
아닌 일로 문득 가라앉은 기분이 되었다.
코로나 이후부터 배달음식의 노예가 되어
돈은 돈대로, 몸무게는 생애 최고점을 찍고
시켜먹는 음식 중 마음에 드는 것도 없으니
오랜만에 쿠키를 구웠는데 웬일로 망쳤다.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데. 요 며칠
컨디션이 가라앉도록 무리가 되기는 했다.
쿠키 반죽에까지 내 상태가 전달되었다니.
망쳤으면 먹지 않으면 될텐데 보상심리로
머리를 굴리지만,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스스로 만들어 먹는 것보다 나은 건 없다.
그러나 이미 다시 만들기에는 가라앉았다.
정말 쿠키 때문일까?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엄마의 유난히 영광스러운 '희생정신'
에 대한 생각으로 시작된 가라앉음이었다.
엊그제 오랜만에 부모님댁에 갔다.
오직 현미와 쑥으로만 만든 송편이 있었다.
알고보니 엄마가 만들어 쪄 놓은 것이었다.
지금 엄마는 이럴 상황이 아니다. 암 증상이
악화되어 삶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해도 어쩜
과언이 아닌데, 시급한 것은 제쳐두고 이런
떡이나 만들어 나를 주려 하다니. 애가 타서
엄마 제발 정신을 차리라며 붙들고 말하다,
그래도 잘 먹겠다며 가져왔다. 운전 중 하나
먹는데 쉰 내가 났다. 밤 사이 상한 것일까?
남은 쉰 떡을 부모님 드실까봐 전화를 걸어
말씀드렸다. 앞으로 절대 만들지 마시라고,
지금 치료에만 집중하고 나을 생각만 해야,
에너지를 아껴야만 한다고 재차 당부했다.
엄마는 알았다고 했는데, 당일 저녁 전화로
근심과 불안이 가득한 아버지 전화가 온다.
"네 엄마가 떡을 새로 만들어야겠다고 하는
거야, 그렇게 현성이가 그러지 말라고 내내
그렇게 얘기를 하고 갔는데, 또 만든다고.."
하루이틀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건강한 형부나 조카네 집에다가
고급 유기농 배와 비싼 사과세트를 보내주고
암에 걸린 자신은 어디서 팔지도 못해 떨이로
큰 궤짝에 2만원 하는 굴러다니던 사과를 사
갈아 먹으면 병이 대체 언제 낫는다는 말인가.
어젯밤, 엄마의 조카이자 나의 친척과 통화 후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이 나를 가라앉힌 걸까.
큰 부담이기는 했으나 어떻게든 낼 테니 그래도
병원에 가서 치료받으시라 해도, 보험 유예기간
이라 끝까지 안 가고 그 사이 분명 악화 됐는데,
조카가 자신의 힘든 상황을 말하자 강권하면서
큰 돈을 보내주었더라. 내가 친척에게 물었다.
"우리엄마가 언니에게는 아주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나에게도, 우리 가족에게도 좋을까?"
물론 우리엄마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나에겐 고문이다.
고생하는 아버지는 무슨 죄냐고,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일 수만 있느냐고 물어도
사실 소용은 없다. 자신의 암 보험금을 병원비에
사용 못 하고, 재혼한 조카 친아들도 아닌, 전처
아들이 외국에서 결혼하는 데에 낼 축의금까지
대신 내 주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 돈은 사실,
엄마 조카가 재혼한 남편이란 자의 술값이 됐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집은 왜 이렇게 사나,
엄마는 도대체 왜 그런가, 엄마 주변 사람들은 왜
엄마로부터 정신적 물질적 도움만 받으려 하는가
여러생각이 엄습하는 것이다. 처음일 리 없으나,
오늘은 조금 가라앉았다. 늘 있어온 일인데 유독
가라앉은 이유는, 이른 새벽 꾼 꿈과 연관이 있다.
공격이다.
나를 무력화하고 싶은 악한 영의 공격.
왼팔로 우리엄마 목을 죄고, 오른팔로 날 죄려던
악한 자의 공격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되고
넉넉하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베풀 수 있다면
감사한 것이다 라는 엄마의 입장도 잘 안다.
그러나 이 삶은 한편 너무 이상하고, 애매하다.
암에 걸려 몸이 힘든 사람이 그늘 없는 땡볕에서
수십개의 블루베리 나무의 열매를 한알한알 따고
건강한 사돈댁, 건강한 조카들의 집에 보내는 건
아주 이상하고 딸의 입장에서는 괴로운 일이다.
블루베리 나무를 불태워버리고 싶다는 격정적
생각까지 스쳤으나 막기 전 노동은 끝이 났고,
고맙다 잘 먹겠다며 잘 먹고 앉아있는 그 모든
사람들을 보며 나 홀로 무력감을 느끼는 날들은
내 인생에서 계속 있어왔던 일들 중 하나이다.
나에게는 어머니의 성향과 아버지의 성향이
골고루 섞여져 있고, 어머니의 것도 강한데,
그런 어머니로부터 너무 고통을 받아서인지
어떤 순간엔 끔찍할 정도로 그 태도가 싫다.
희생에도, 절제가 필요하다.
남들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고마운 마음을 가진대도
그가 얼마나 큰 희생을 하는지 사실 관심없고
알 필요도 없으며 나중에는 당연하게 여긴다.
뼛 속 영양분 - 골수까지 다 빨아먹게 되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거나, 느껴도 행한다.
더, 더, 일평생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는 동안,
그녀는 누가 지켜줄 것인가. 그녀가 신인가.
어릴 때 친가와 아버지로부터 엄마를 지키고
싶었다면, 크고 나자 주변 모든 인간들로부터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내가
지킬 수 없음을 알았을 때 나는 가라앉혀진다.
그 '모든 인간들'에는 나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현성아, 내가 고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뭐가 있겠어. 기도해 줘. 기도 밖에 없어..."
꿈처럼 되지 않으려면 일어나 기도해야 하나
나는 앉아서 눈물을 흘린다.
위대한 이를 어머니로 둔 사람은 많이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