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집을 경매로 넘기고 우리가 이사 온 곳은 학교에서 불과 5분 거리인 상가 2층이었습니다.
원래 큰방과 작은방 두 개를 쓰기로 계약했는데, 그곳에 살던 사람이 절대 큰방은 못 비킨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작은방 하나엔 풀지도 못한 짐을 부리고, 안쪽 컴컴한 방에서 여섯 식구가 쪼그리고 잠을 자야 했습니다.
곧 추석이 되었습니다.
우리 집엔 송편도, 사과도 한 알 없었습니다.
맏아들인 아버지는 시골로 제사를 떠나시고,
왠지 모르게 처량한 명절 아침이 되었습니다.
그날 분명히 밥은 먹었을 텐데…
유난히 허기가 졌던 기억이 납니다.
새 옷 입고 손에 먹을 것을 쥐고 노는 동네 아이들의 모습이 상가 아래 골목에 보여서
더 배고팠을까요.
엄마에게 송편을 해 먹자고 졸랐던 것도 같습니다.
많이도 말고, 한 접시만이라도…
집을 잃고 실의에 잠긴 엄마가
무슨 기운이 나서 떡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나는 동생들과 철없이
송편을 조르며 엄마를 괴롭혔습니다.
아무리 졸라도
엄마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화가 난 나는
저녁무렵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어디로 갈까?
갈 곳이 없었습니다.
건너편 언덕 위로 올라갔습니다.
동네가 다 보였습니다.
다 행복한데
우리 집만 불행해 보였습니다.
한 친구가 저쪽에서 다가왔습니다.
영락모자원에 살고 있는
같은 반 친구였습니다.
평소에 친한 친구는 아니었는데,
친구를 보니 반가웠습니다.
둘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나누다
추석인데도 사과 한 알 못 먹었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하며 사라졌습니다.
잠시 후 친구는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사과 한 알을 내게 주었습니다.
명절이라 여기저기서 후원품이 많이 들어와
자기 집엔 사과가 있다며
나에게 먹으라고 주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껍질째 빨간 사과 한 알을
우적우적 다 먹었습니다. 강챙이까지 싹 다 먹었습니다.
내 친구는 그런 나를 아주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해 추석, 나는 너무너무 먹고 싶던 사과를
해 질 녘 노을 속에서 먹었습니다.
그때 내게 사과를 주었던 그 친구.
자기에게 하나밖에 차례가 돌아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귀한 사과를 친구를 위해 기꺼이 내놓았던 그 친구가
오늘 많이 생각납니다.
아버지가 없었던 그 친구.
그래서 엄마와 동생과 함께
영락모자원에 살아야 했지만
마음은 넉넉했던 그 친구가
지금 어디에서 살든지 행복하기만을 바래봅니다.
그리고 나도 그 사과를,
그 고마움을 평생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친구야, 고마워.
네가 준 그 사과가 있어
그해 가을은 따뜻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