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때린다.
부모는 부모고 나는 나인데,
부모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내 집을 팔아서 뒷바라지한 아들도 골 때리고,
그 비싼 상황버섯을 팔지도 않고 남에게 모두 주어버린 농부 아저씨도 골 때린다.
아무튼 모두 골 때리는 사람들 투성이 이야기들을 읽고 글을 쓰려니, 나도 골 때리는 중이다.
이런 글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성원이가 자수성가한 엄격한 아버지를 무서워했지만,
성원이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어머니의 고마움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나는 나, 부모는 부모'
냉정하게 줄을 그어놓았더군요.
돈 가는 데 마음 간다고,
아들 고등학교 한번 보내보려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생활하는 엄마의 마음은
오히려 귀찮은 간섭이었나 봅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모른 채
감사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아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지만 이대로 성원이를 버려두기에는,
성원이 엄마의 간절함이, 그리고 저를 챙겨주는 그 마음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수학이나 영어보다 그래도 국어가 아이들에게
인생을 살아갈 바른 길을 가르칠 수 있는 과목이라 생각하고
국어 교사가 된 사람이기에,
그날부터 저는 일주일에 한 번 30분씩 성원이를 붙잡고 글짓기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교재는 주로 신문이었습니다.
짧고 간결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없이 가르쳐 주는 글들을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또 글을 쓰고...
조금씩 아이가 달라졌습니다.
공부하란 말만 했지 누구도 아이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 주지 않았기에,
아이는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골 때린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죠.
귀한 과외 시간에
하라는 시험 대비는 안 하고,
신문 읽고 요약하고 쓰고 했으니
저는 불량 과외교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수업에서
부모님도, 선생님도 말해 주지 못한
인간의 바른 길을 스스로 알아갔습니다.
3년쯤 그런 수업을 하다 성원이와의 인연은 끝이 났습니다.
2년 6개월 뒤,
성원이 엄마가 논술팀을 짰다고 연락이 와서, 여름방학 동안 단기로
성원이와 그 친구들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첫 수업.
교재는 그 당시 큰 사건이었던 씨랜드 화재로
유치원 아이들이 모두 죽은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였습니다.
어른들의 부주의와 안전 불감증이 부른 인재.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재가 되어버린 아이들이었습니다.
쌍둥이였던 형제는 그 순간 꼭 껴안고 있어서,
맞붙은 셔츠는 타지 않았다는 기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군요.
중대 미대 지망인 성원이,
영국 유학 갔다가 돌아온 서울대 지망생,
연대 철학과 지망인 아이.
이렇게 셋이서 조용히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1시간 뒤,
아이들이 낸 글을 첨삭하던 저는 성원이의 글을 읽으며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몇 년 만에 만난 성원이는
가슴 아픈 사건에 같이 아파하며
우리 사회와 어른들을 준열히 비판하고
아이들의 명복을 비는 감동적인 글을 써낸 것입니다.
이것이 '골 때린다'는 글로부터 시작된
저와 성원이의 논술 수업 이야기입니다.
저는 성원이의 가슴속에 작은 씨앗 하나를 심었습니다.
그 씨앗을 몇 년 동안 성원이는 큰 나무로 키워놨더군요.
아이들의 가슴에 작은 씨앗을 심는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날이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저는 성원이 덕분에 논술 교사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바쁘게 논술 교사로 살아가던 어느 날,
성원이 엄마가 멀리서 저를 보고 뛰어오셨습니다.
미국 예술대학으로 유학 간 성원이가 처음 1년간은 영어 때문에 고생했는데
이젠 영어가 편해져서,
미술 철학 시간에 써낸 에세이에 교수님이
‘Excellent’를 두 번 쓰고, 느낌표 팍팍 찍어 주고,
‘영혼을 울리는 글’이라고 평을 써놨다고 자랑을 하시더군요.
그날 저도 너무 기뻐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