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여행
달랏에서 다시 호치민으로 왔다. 귀국을 앞두고 편하게 쉬다 가려고 공항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serviced apartment를 숙소로 잡았다. 그런데 이 지역이 뜻밖에도 산책하기 좋고 소소한 구경거리도 많은 곳이었다! 관광지 분위기는 전혀 아니고 그야말로 일상적 풍경. 하지만 평범한 동네길 걸어 다니기 좋아하는 여행자에겐 매력적인 곳이었다.
떤선녓 공항이 있는 이 구역은 호치민의 행정구역 중에서 ‘떤빈군’에 속한다고 한다. 국제공항이 있는 지역 하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외곽지가 아니라 집이 있고 식당과 가게들이 있는 일반 동네이다. 다소 놀랍게도 공항 바로 근처까지 건물이 많았다(호치민에 처음 온 건 아닌데 왜 기억이 안날까. 워낙 오래 전이라서 그 사이에 변한건가). 공항 가는 큰 길은 잘 닦여 있고 화려하다. 하지만 골목으로 들어서니 서민적인 느낌이 물씬 났다.
숙소 근처 카페에서 국수로 아침을 먹은 뒤 골목 구경을 다녔다. 큰길이 아니라서 차는 거의 없고 오토바이도 많지 않다. 달랏보단 당연히 덥지만 이른 아침이라 아직은 다닐만하다.
동네를 산책하다가 매력적인 절과 성당을 발견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종교적 건물들은 그 지역의 사람들이 상상한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기에 종종 여행자에게 묘한 감동을 준다. 현지인의 삶 속에 한 발 들어온 느낌도 있고.
# Giac Ngan Buddhist Temple
골목에서 우연히 발견한 작은 절. 나무가 우거진 정원 안에 있었고 공간은 소박했지만 구석구석 깔끔하게 잘 손질되어 있었다. 정원에 있는 부처님 조각상이 마치 성모마리아상처럼 보여서 흥미로웠다.
# Saint Dominic's Parish Church
베트남 스타일의 외관을 한 천주교 성당. 가까이 가보니 문이 열려 있었고 마침 일요일 아침이라 미사를 하고 있었다. 달랏의 성당들은 시간이 안 맞아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는데, 여기선 행운이다. 청록색을 베이스로 한 건물, 조각상, 장식들의 양식은 그야말로 동서양의 만남이었다. 이제 식민지 시절 과거의 상처들은 사라지고 혼종 문화의 독특한 아름다움만 남은 것일까. 아니면 아직 어떤 것은 현재진행형일까. 잘 들어보니 미사가 영어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앉아있는 사람들은 거의 현지인이었던 것도 특이했다.
숙소가 있는 골목길은 나무가 우거지고 흰 벽과 작은 화분들이 어우러져 아늑하고 쾌적한 느낌이었다. 길 자체는 허름하고 도로상태도 안좋았지만 분위기기 우중충하거나 삭막하지 않은 것은 벽을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는데다 식물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 이 골목만이 아니라 호치민이나 달랏 어디에나 식물들이 풍성했다. 나무와 화분들은 시시때때로 내리는 소나기로 싱싱함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라오스에서도 그랬지만 어쩌면 우기의 동남아 여행에서 가장 멋진 점은 비에 씻긴 식물들의 생명력이 아닐까. 오후에 요즘 뜨는 동네라는 타오디엔에 갔을 때 또 다시 갑자기 폭우가 내려서 급히 바로 앞의 콩까페로 들어갔을 때도 와중에 나무가 우거진 정원 풍경에 우선 감탄이 나왔다. 군복(?)을 입은 카페 스탭들이 커다란 우산을 씌워주자 마치 정글 속의 아지트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콩까페가 베트콩을 테마로 한 곳이라는 걸 여기 와서 처음 알었다).
- 숙소 자체도 마음에 쏙 들었다. 호텔이 아니라 일반 집인데 감각적인 디자인 같은 것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분위기가 편안하고 공간이 넓었다. 옆방에서 나오는 사람을 보니 왠지 그냥 현지인 같았다. 단 이틀을 묵었는데 과장 보태자면 마치 호치민에 온 지 몇 달 된 것 같은 착각이. 하지만 나는 ‘영웅’ 이름을 도시에 붙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 도시는 내게 (그리고 사실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항상 ‘사이공’으로 남아있을거다. 떤빈군에 숙소를 잡지 않았으면 몰랐을 이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을 경험하고 간다.
- 사이공의 행정구역인 ‘군’이 표시된 지도. 첨엔 1군 2군 하는게 무슨 소린지 몰랐다. 무슨 야구단인 줄. 약간 파리의 아롱디스망 배치 같기도 한데 이것도 식민주의 과거의 산물일까. 비행기 그림이 있는 곳이 떤빈(Tan Binh)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