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집에 일이 생겨서 해결하느라 너무 지쳐서 재충전이필요했다. 혼자 강릉행 KTX를 탔다. 할 일이 쌓여있지만 에라 모르겠다 내일의 나에게 맡기자 하고 막바지 여름 여행을 떠난 것이다. 동행 없이 여행해 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에너지 레벨이 높은 시기였다면 좀 쓸쓸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누구하고도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상태여서 2박 3일 동안 오로지 여행의 감각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어쩌다 보니 혼자 여행 갈 기회가 잘 없었을 뿐, 사실나는 단독으로 잘 돌아다니는 사람이다. 혼밥도 잘한다. 하지만 은근히 겁이 많은 게 문제라면 문제. 그래서 복도가 어두컴컴한 호텔 같은 곳은 피하고 개방된 공간에 적당히 사람들이 있는 게스트하우스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늘 숙소 운이 좋은 편인데 이번에는 조금 만족스럽지 못했다. 오래 찾아보지 않고 예약을 해버려서 그런지… 깔끔하긴 한데 인테리어가 차가운 느낌이다. 이건 애초에 사진에서 예상했던 부분이지만, 사진에 탁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잘못 본 건지 방에 냉장고도 탁자도 없었다(여행 중에 줌 회의를 해야 해서 좀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방 크기가 아주 작은데 침대가 높아서 편안한 느낌이 아니었다. 침대 높이만 낮았어도 괜찮았을 텐데… 그래도 예약할 때 방에 테라스로 나가는 문이 있는 걸 보고 이 문이 방 크기를 상쇄해주지 않을까 싶었고 이건 어느 정도 예상대로였다. 블라인드를 올리고 문을 열어놓으니 방이 조금은 넓어 보였다. 테라스에서 내려다보이는 소박한 동네 풍경도괜찮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강릉 시내에 깔끔한 게스트하우스가 꽤 생긴 것 같더라. 다음엔 더 많이 알아보고 묵어야지. 다음에 또 갈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이번 강릉 여행이 꽤 좋았던 것 같다. 다음엔 T와 함께 가던가친구들과 함께 가야겠다.
해수욕장에 난생처음 와보는 사람처럼 이틀 동안 해변을 4군데나 돌아다녔다. 송정, 안목, 경포, 강문. 송정과 안목은 심지어 두 번씩이나 갔다. 남해의 아기자기함도 좋지만, 시원한 바다는 역시 동해다! 꽤 오랫동안 동해바다를 잊고 있었다. 사진 찍어서 보면 황량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해변이 광활하다. 아파트와 호텔들이 미친 듯이 들어차 있는 부산 바다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아무것도 없다시피 넓게 펼쳐져 있는 바닷가가 갑자기 생소했다. 경포 해수욕장 양쪽으로는 위압적으로 높다란 두 호텔이 들어서 있었지만, 그것들을 제외하자면 놀랍게도 강릉바닷가엔 높은 건물들이 없다. 한가하고 널찍하고 여유로운 느낌이다.
해변마다 개성이 달랐고 다 좋았지만 나는 송정해변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이곳은 주변에 호텔이나 식당이 거의 없고 송림만이 우거져 있다. 동네 사람들이 돗자리 깔고 누워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송림은 소박했고 깨끗했다.
경포해수욕장 주변처럼 먹을 것이 즐비하지 않고, 매점이 딱 하나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테이블과 벤치들이 놓여 있었는데, 여기 앉아서 오전부터 맥주를 마시는 동네 어르신들이 보였다. 두 번째 갔을 땐 간이무대에서 오카리나(?)를 부는 사람도 있었다.
얼린 생수를 사서 바다를 보면서 앉았다. 8월 중순에 접어들어서인지 더위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고 바닷바람이 솔솔 불었다. 아직 오전이라서 그런지 수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비치파라솔 아래 그저 앉아있는 사람들이 점점이 보였다. 부서지는 파도를하염없이 보고 그 리드미컬한 소리를 최대한 오래 들으며 앉아 있었다. 이 풍경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의 감각에 집중하기 - 전에 넷플릭스에서 본 명상법이다. 이곳에서는 크게 어렵지 않은 것 같다. 폰도 보지 않고 경치만 감상했다. 아마도 내 평생 바다를 가장 오래 보고 있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다음날 오후에 다시 송정해변에 갔을 때는 뜻밖에도젊은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틀 동안 바닷가에만 가 있다 보니 각 해변의 특색이 눈에 들어오더라. 송정해변은 한가한 분위기와 달리 의외로 파도가 강한 곳이었다(같은 날 여러 해변을 잇따라 갔기에 차이가 확실히 느껴졌다). 20대들이 많은 것은 그래서인가. 그러고 보니 어린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아늑하다기보다는 적당히 야생적이었고 탁 트인 느낌이었다. 경포나 강문 해수욕장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오던 안전요원의 호루라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지나치게 과민하게 불어대는 그 소리들이 이번 여행의 유일하게 짜증 나는 요소였다 : 그런데 행여라도 사고가 나면 왜 제대로 단속을 안했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이 나라엔 자아가 공공재니 어쩔 수 없다).
가까이서 보면 꽤 세게 밀려오는 파도가 멀리서 보니 잔잔해보인다. 거리를 두고 앉으니 사람들이 즐겁게 떠드는 소리도 아련한 배경음악처럼 들린다. 햇살은 더할 나위 없이 밝았지만, 미세먼지인지 안개인지 땅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선에는 윤곽이 희미하게 흐려졌다. 바다를 보고 섰을 때 왼쪽 아득히 먼 곳에 보이는 높은 건물이 경포 해수욕장의 호텔이라는걸 경포에 다녀오고나서 알았다. 걸어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닌데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서 보이는 것이었다. 이 모든 풍경에는 확실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었다.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와도 육지는 견고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밀려오게 내버려 두자.
생명이 바다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바다를 그리워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면 생명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렇다면 바다에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사는 것이 좋은 게 아닐까. 육지가 끝나는 곳에 가면 항상 바다가 있다는 것. 이 단순한 사실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덧) 송정해변 근처에 ‘해당화 연립‘이라는 곳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 이름으로도 당당히 나와있어서 이정표 역할을 하는 건물 같았다. 외양은 연립이라기보다 저층 아파트처럼 보였지만 2층인 것보니 연립 같기도 하고… 건물 자체는 지은지 오래된 듯 했지만외벽은 최근에 새로칠한 듯 하얀색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송림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다. 인가가 없는 곳에 홀연히 나타난 이 아파트에는 마치 영화촬영을 위해 임시로 지은 듯 뭔가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데 이곳에 왜 이렇게 생긴 아파트가 있을까? 이 건물이 인상적이어서 버스를 타고 나서도 자꾸만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