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여행
다트무어에 두 번째 간 것은 2017년 10월이었다. 리서치 여행으로 코펜하겐과 암스테르담에 갔다가 문득 암스테르담에서 다트무어의 관문 도시 엑시터까지 가는 직항 비행기가 싸게 나온 걸 보았다. 오슬로에 가려던 계획을 접고 영국으로 향했다. 당시 일에 치어 무척이나 지쳐 있던 나는 조용한 황야에서 쉬고 싶었다. 내가 애정하는 다트무어에서의 휴식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빠듯한 일정에 영국까지 간 건 역시 무리였던 듯, 엑시터에서 버스를 타고 타비스톡에 도착하니 목이 아프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타이레놀과 뜨거운 차로 응급처방을 하고 잠들었다. 하긴 대도시도 아니고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시골에 갔으니... 이 21세기에 동양인이라곤 나 한 명 밖에 안 보이는 곳에.
그런데 호텔이 대박이었다! 타비스톡의 베드포드 호텔. 호텔인지 성인지 헷갈릴 정도. 그야말로 아가다 크리스티의 소설 속에나 나올 것 같은 분위기... 미스 마플 같은 동네 할머니들이 총집합해서 차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천정이 높고 햇볕이 잘 들어오는 우아한 침실, 오래된 그림과 사진들이 빽빽히 걸려있는 벽, 전 세기의 물건들로 가득 차 있는 듯한 살롱,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 같은 호텔이었다.
데본은 어떤 곳인가 하면, 예쁘지만 적당히 예쁠 뿐 눈이 휘둥그러지게 아름답지는 않다. 마을은 소박하고 수수하다. 다트무어의 황야도 그렇다.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는 듯 삭막함 그 자체인 미국 서부의 자연과 비교하면, 적당히 낭만적이고 적당히 황량하며 또 적당히 아름답다. 그래서 이곳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는지도 모른다.
하루에 딱 한 두 번 다니는 버스를 타고 다트무어로 들어갔다. 마을을 빠져나와 황야를 걸었다. 바보같은 질문이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왜 이렇게 황량한 곳에 살고 있을까? 예전에 감옥이 있었다고 하니 그 관계자들이 정착한 건가. 버스에 함께 타고 온 꼬마 아이들이 나를 보고 "왜 저 여자는 여기 사진을 이렇게 많이 찍어?" 한다. 얘들아 다 들려. 나도 영어는 들을 줄 안단다 ㅎㅎ 그리고 늬들에겐 여긴 집이지만 내게는 무척 신기한 곳.. 아니 오랫동안 로망이었던 공간이란다. 아이들은 풍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재잘재잘 장난을 친다. 내가 내리기 한 정거장 앞, 작은 집 앞에서 내린다.
다트무어 근처에 있지만 황야 밖에 위치한 타비스톡이 아기자기하고 나름 활달한 분위기인데 비해, 황야 안의 마을 프린스타운은 이른 오후부터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썰렁한 곳이었다. 코난 도일이 <바스커빌의 개>를 구상했다는 호텔은 현재 다트무어 비지터 센터로 운영하고 있었다.
펍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난 차보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영국에선 역시 차.. ) 센터 길 건너 버스 정류장 표시도 없는 곳에 서 있으려니 나와 같은 처지의 한 노부부가 다가왔다. 연세는 꽤 있으신 것 같은데 몸이 꼿꼿하고 스타일이 멋있는 노부부였다. 그들과 함께, 과연 버스는 오는 것일까 토론(?)하다 보니 예정시간보다 15분은 늦은 버스가 왔다. 노부부의 행선지는 플리머스였다. 나는 타비스톡으로 돌아왔고. 다트무어 깊숙히 들어갔다오니 이 작은 마을이 갑자기 안락하게 느껴졌다. 침대에 몸을 파묻고 누웠다. 내일 떠나야하는 곳에서도 집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 여행자의 특권.
(여행시기 : 2017.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