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시아 여행
(여행시기 : 2018.7)
어린 시절 나에게,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오리엔트 특급의 살인>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함께 추리소설의 매력과 여행의 로망을 함께 가져다준 책들이었다. 살인사건 이야기다보니 로망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수 있겠지만, 묘하게도 잉글랜드의 데본 어디쯤의 섬이나 이스탄불을 출발한 오리엔트 특급 열차가 거쳐가는 유럽 도시들의 이름은 나에게 즐거운 상상의 여행지로 남았다.
조니 뎁이 나온 최근의 미국 영화 <오리엔트 특급의 살인>은 어울리지 않는 캐스팅에 크리스티 월드의 아우라가 전혀 없는 지루한 분위기였지만(피터 유스티노프가 나온 옛날 영화가 훨씬 좋았다), 열차가 출발할 때 차장이 외치는 기착지 이름들만큼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소피아, 베오그라드, 로잔, 베네치아...
그리고 마침내 2018년 여름에 떠났던 터키와 그리스 여행! ‘마침내’라는 표현은 이 여행을 오래 기다려서가 아니고(대체로 내 여행은 우연히 성사된 경우가 많다), 이 두 나라가 너무 엄청난 문화유산들을 지닌 여행지 중의 여행지이기 때문에 써보았다. 볼 것이 넘쳐나는 곳이다 보니 그야말로 본격적인 여행지가 아닐 수 없는 곳들. 이 ‘본격적인 여행’도 내게 큰 즐거움을 주었지만, 유쾌한 카오스의 도시 이스탄불에서 작은 번외편의 선물처럼 어린 시절의 기억 중 하나와 우연히 마주쳤던 것은 뜻하지 않은 기쁨이었다. 터키는 내게 ‘환상 계열 여행지’는 아닌 줄 알았는데 가이드북을 보니 크리스티 팬이 가봐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시르케지(Sirkeci) 역과 페라 펠리스 호텔(Pera Palace Hotel)이었다.
시르케지역은 옛날 그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출발역(종착역)이었다고 한다. 1883년에 운행을 시작해서 이스탄불에서 파리까지 3천 킬로를 달리던 이 열차는 (<오리엔트 특급의 살인>에선 칼레에서 배로 갈아타고 런던까지 가는 여정이었던 듯) 1977년에 운행을 중지했다고 한다. 왠지 소설의 눈 쌓인 겨울 분위기가 고정된 이미지로 남아서인지, 종려나무가 있는 느긋한 분위기의 여름 시르케지역을 보니 낯설었다. 크리스티 여사의 흔적 같은 건 없었지만, 역사 안에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레스토랑’이 있어서 반가웠다.
역은 생각보다 작았고 전체적으로 쇠락한 분위기였다. 왕년에 유럽 대륙을 횡단하던 호화열차가 출발했던 곳이라는 느낌은 없다. 하지만 고풍스러운 장식들에는 아직도 과거의 화려함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정교한 장식이 달린 지붕과 분홍색의 외벽, 색유리를 끼운 둥근 창, 낡았지만 우아한 지붕과 바닥을 가진 긴 회랑이 있었다. 그리고 묘하게도, (지금 돌이켜보면) ‘터키의 느낌’이 있었다. 가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 나라의 색감과 분위기.
각종 탈 것에 무한한 애정을 가진 T는 오리엔트 특급이 계속 운행되지 않는 것을 매우 애석해했다. 역 자체가 활발하게 사용되는 중심 역은 아니었고, 현재 시르케지역에서 탈 수 있는 국제열차는 불가리아의 소피아까지 가는 야간열차가 전부였다. 왠지 소피아가 지척에 있는 듯 가깝게 느껴졌다.
페라 펠리스 호텔은 크리스티 여사가 투숙하면서 <오리엔트 특급의 살인>을 썼던 호텔이라고 한다. 이 사실도 가이드북에서 처음 알았다. ‘페라’는 지금은 베이올루라고 불리는 지역의 옛 이름이라고. 크리스티 여사는 이 호텔의 411호에 늘 묵었고, 지금도 이 방은 ‘크리스티 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한다. 방까지 가보진 못했지만, 1층 로비와 식당이 너무나 고색창연하게 아름다워서 막 탄성을 지르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화사하고 밝은 느낌의 현대식 호텔이 아니라 조명이 어둡고 색깔이 육중한, 지나간 세기의 분위기를 지닌 곳이었다. 크리스티 소설 속에 항상 나오는 ‘옛날식 호텔’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동서의 모든 문화가 흘러드는 이스탄불에 있어서일까, 전형적인 유럽식 호텔도 아니었다. 천정이 매우 높았고, 갈색의 대리석 장식은 우리가 이스탄불에서 많이 보았던 옛 유적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천장에 둥근 창이 뚫려 있어서 빛이 들어왔고, 붉은색 소파들과 탁한 장밋빛의 색유리가 묵직하게 빛났다.
페라 펠리스 호텔에는 크리스티 여사의 흔적이 꽤 남아 있었다! <오리엔트 특급의 살인> 책도 진열되어 있었고, 여사의 사진도 걸려 있었다(초점이 안맞아 흐릿하게 찍혀버렸지만). 크리스티만이 아니라 히치콕 감독도 이 호텔 손님이었나 본데, 난 히치콕 영화의 팬이기도 하다. 선물의 연속이다. 제3의 인물은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였는데, 엘가의 음악이 깔리던 <덩케르크>의 그 유명한 장면이 절로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어떻게 이렇게 한 데 모여있지? 마치 누군가 일부러 애교 넘치게 심어놓은 추리 단서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