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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hoes Feb 16. 2019

다트무어, 셜록 홈스와 미스 마플

영국여행

마차가 고개를 다 올라서자 우리 앞에는 뒤틀리고 울퉁불퉁한 돌무덤과 바위산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광막한 황무지가 나타났다. 한줄기 차가운 바람이 스쳐가자 우리는 오싹 몸이 떨렸다.. 우리는 이미 그 비옥한 고장을 멀리 저 아래에 두고 온 것이다. 되돌아보니 기울어가는 저녁 햇살이 개울을 금색 띠로물들이고, 쟁기가 새로 뒤집어엎어놓은 밭의 붉은 흙과 넓게 엉클어진 삼림지대 위에서 빨갛게 타고 있었다.

거대한 둥근 바윗덩어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적갈색과 올리브색의 가파른 비탈길을 넘어갈수록 길은 점점 더 음산하고 황량해졌다. 이따금 지나치는 황무지의 오두막집들은 벽이며 지붕이 돌로 되어 있었으나, 그 거친 윤곽을 덮어줄 담쟁이덩굴도 없었다. 갑자기 눈 아래에 찻잔처럼 움푹 파인 지대가 나타났다. 이곳에는 몇 년 동안 사나운 폭풍우에 뒤틀리고 이지러진 키 작은 떡갈나무와 전나무가 군데군데 있었다. 그 나무숲 너머에는 높고 뾰족한 탑이 두 개 솟아 있었다. 마부는 말채찍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저것이 바스커빌 저택입니다."

- 아서 코난 도일 <바스커빌의 개>

이 책에 나오는 다트무어의 묘사는 너무 생생해서 직접 가보지 않고 쓴 거라고 생각하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나는 어린 시절 이 황야가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이 들어 우연히 영국에 여행가게 되면서, 추리소설 재출간 붐이 일어 옛날의 그 책들을 새 장정으로 만날 수 있게 되면서, 오래 잊었던 이 다트무어의 황야를 기억해냈다. 그리고 이곳이 잉글랜드 남서쪽 데본셔에 있는 현실의 장소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언젠가 한번 이곳에 가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첫 번째 영국 여행에서 당연히 다트무어를 우선 행선지로 잡았지만 불행히도 정보가 어두웠다. 겨울이라 대중 교통이 끊겼다는 게 아닌가. 차선책으로 하워스의 황야에 갔었지만 이곳은 황량하다기보다는 아기자기한 풍경이라 약간 실망했었다.

마침내 다트무어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은 2011년 4월이었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지고 얼마 안 된 때였다. 아직 원전사고의 심각성이 채 알려지기 전이었는데도, 바다 건너 다른 나라 사람인 내게까지 사고의 충격파가 심하게 닥쳐왔다. 거센 바람이 부는 다트무어의 어두운 하늘은 가라앉은 마음과 어울렸다.



사진은 다트무어의 비바람 치는 날씨를 온전하게 담아내지 못했다. 햇살과 비와 안개와 바람이 분단위로 들이닥치던 이 황야의 날씨는 내가 상상하던 바로 그대로였지만, 실제로 그 속에 있을 때는 추위에 덜덜 떨면서 예약한 택시가 좀 빨리 왔으면 했다. 푸근한 중년 부인이었던 택시 운전사는 적절한 무관심과 작은 친절로 우리를 편하게 해 주었다.


한 무리의 말들이 황야를 놀라운 속도로 가로질러갔다. 방목하는 말치고는 참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가이드북에 보니 야생마들이라고 한다.



다트무어는 <바스커빌의 개>만이 아니라 애거서 크리스티와도 인연이 있는 곳이다. 크리스티 여사가 첫 작품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을 완성한 무어랜드 호텔(Moorland Hotel)이 우리가 올라간 이 바위산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헤이터 록(Haytor Rock)이라고 부르는 이 바위는 다트무어의 전망대와 이정표 역할을 하는 몇 개의 포인트 중 하나다. 크리스티 여사는 소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 바위산에 올라가곤 했다고.



우리는 다트무어 어귀의 작은 마을 보비 트레이시(Bovey Tracey)에 묵었다. 런던보다 물가도 싸지 않았고 침실은 추워서 난로를 따로 청해야 했지만, 마을은 깔끔했고 소박한 매력이 있었다.


보비 트레이시를 거점 삼아 대중교통으로 다트무어를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황야 깊숙히 들어가는 버스노선은 없었다(여름에만 운행한다고..). 버스로 갈 수 있는 곳은 북쪽 가장자리의 마을 오크햄튼뿐이었다. 하기야 황야 속에 마을이 있다는 게 어떻게 보면 더 특이한 일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국립공원이 사람의 흔적을 거부하는 광막한 자연이라면, 영국의 국립공원인 다트무어는 낭만적인 황야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여긴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었다. 크리스티 소설 속 미스 마플이 사는 세인트 메리 미드도 다트무어 속의 작은 마을들을 모델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한다. <저스트고> 가이드북엔 아예 세인트 메리 미드의 모델이 된 마을이 Widdecombe(Haytor Rock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있는 마을)이라고 되어 있던데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구체화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에는 펍이 딸려 있었는데, 저녁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북적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우연찮게 대화를 나누게 될 때면 수줍게 영국은 어떠냐고 물어왔다. 영국 사람들의 이 보일 듯 말듯한 친절함을 우리는 이후에도 몇 번 마주쳤다.


(여행시기 : 20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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