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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hoes Dec 24. 2020

에게해(Aegean Sea), 그리고 에게해의 섬들

그리스

(여행시기 : 2018.7)


키클라데스 제도의 섬들, 특히 산토리니는, 섬이 그냥 섬이고 바다가 그냥 바다겠지 했던 짧은 생각을 완전 수정하게 만들었다. 왜 어떤 바다는 이렇게도 아름답고 어떤 섬은 이다지도 멋지단 말인가. 서쪽으로는 깎아지른 벼랑이, 동쪽으로는 장대하게 펼쳐진 구릉이 이 섬에 엄청난 스펙터클을 선사해준다. 거기다 벼랑에 촘촘히 모여 있는, 우리가 아는 바로 그 흰 벽과 푸른 지붕들. “사람이 만든 것과 자연이 만든 것, 보통 한 가지만 좋은데, 여긴 두 가지가 다 좋구나.” T의 말에 나도 동감 또 동감.



산토리니는 포카리 스웨트 광고 등등 때문에 이미 익숙한 느낌이라 처음에는 생략할까 생각했었다. 에게해의 섬들은 페리 시간표에 맞춰서 동선을 잘 짜야하고 날짜는 한정돼 있으니 결국 선택이 필요. 그래도 가봐야 하지 않겠냐는 T말을 듣고 산토리니로 향했는데, 안갔으면 큰일 날 뻔했다! 유명한 곳은 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포카리 스웨트 광고 따위는 이 섬의 매력을 1퍼센트도 전달해주지 못한다! 역시 직접 발을 디디고 온몸으로 분위기를 흡수하는 것이 여행이다. 비록 어딜 가나 사람들로 넘쳐흐르고 혼잡해서 정신이 좀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을 상쇄할 엄청난 풍광이 있었다. 이건 다른 곳에서도 느낀 건데, 그리스의 자연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극적이고 강렬한 그 무엇이.



산토리니는 과거 이 지역에서 힘을 쓰던 베네치아 공국 때문에 붙여진 이탈리아식 이름이라는데, 나는 그리스식 이름 ‘티라’가 더 마음에 들었다. 화산 폭발로 인해 섬의 상당 부분이 가라앉아서 현재의 좁고 긴 지형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상상력이나 감수성은 항상 대륙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에게해의 섬들에 와보기 전까지는 그렇다는 인식조차 못했다. 우리에게 섬은 어쩐지 육지가 끝나는 곳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섬에 갇혔다, 섬을 탈출한다 뭐 이런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이렇게 철저히 동북아시아 사람인 나에게 에게해는 전혀 다른 감수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곳에서 섬은 육지의 끝이 아니라 바다를 향해 열려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바다는 자유를 주는 공간이었다.


실제로 에게해에서 생겨난 많은 문명이 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나니 영 틀린 느낌이 아니구나 싶었다. 키클라데스 문명, 크레타 문명 등등. 오히려 그리스 본토의 문명이 나중에 생겨났더라. 에게해가 육지로 둘러싸인 내해이기 때문에 거칠지 않고 고요하다는 점도 중요한 것 같다. 다른 계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우리가 여행했던 7월은 그랬다.



페리 여행은 매우 쾌적했다. 버스나 기차에 4-5시간 갇혀 가는 것과 비교해보면 공간이 훨씬 넓으니 여유롭다. 너무나 많은 자극이 한꺼번에 몰아닥쳐 피로해진 신경을 쉬기에 딱 좋다. 갑판에 올라가 바다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그 고요함이 마음에 스며든다. 파도 없는 짙푸른 바다를 미끄러지듯 항해하는 페리. 하늘은 푸르고 구름 한 점 없다. 여행 내내 단 하루도 흐린 날이 없었다. 더위를 각오하고 여름에 여행 간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음을 느낀다(겨울은 비 오고 바람 불고 날이 흐리다고 한다. 더욱이 철수한 숙박업소나 가게가 많아서 분위기가 썰렁하다고). 심지어 별로 덥지도 않다. 바람이 적당히 살랑살랑 불어온다.



세월호 사건 이후 바다와 배에 대한 공포증이 생겼던 내게, 에게해 여행은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지금도 나는 머리가 복잡하고 스트레스가 쌓일 때, 고요한 에게해를 떠올린다. 햇살과 바람과 우아한 고요함이 있었던 페리 갑판 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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