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 미국
"어둠의 장막이 집을 감싸고, 누워 있는 벡위스 부인과 카마이클 씨, 그리고 릴리 브리스코의 눈 위에 몇 겹의 어둠이 내려앉도록 그들을 휘감았을 때 실로 밤의 목소리는 다시 들려올 것이다. 왜 이것을 받아들이고, 이것에 만족하고, 순응하고, 체념하지 않는가? 작은 섬들 주위에서 규칙적으로 부서지는 파도의 한숨 소리가 그들을 달랬고, 밤이 그들을 감쌌고, 그 무엇도 그들의 잠을 깨우지 않았다."
-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시간의 흐름을 조절하고 창조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글은, 글쓰기 그 자체가 시간 속의 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담담하게 인정하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슬픈 것 같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록하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무기력함을 예감하는 몸짓으로서의 글쓰기. 나는 버지니아 울프를, 특히 이 <등대로>를 좋아한다.
<등대로>는 상상의 여행을 떠나기에 너무 적절한 소설이기도 하다. 번역자가 쓴 해설을 보면 이 소설의 배경은 스코틀랜드의 스카이 섬이라고 되어 있다. 글 속에는 구체적인 지명이 안 나왔던 것 같은데 어떤 점에서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울프의 많은 작품이 그렇지만 <등대로>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하지만 울프 가족이 실제로 여름을 보내던 곳은 콘월이었다고 한다. 왜 스코틀랜드로 장소를 바꾸었을까? 스코틀랜드는 자연이며 도시며 모든 게 너무 기가 세고 강해서, <등대로>의 섬세함과 어쩐지 안 어울린다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깊은 어둠을 지닌 스코틀랜드가 시간과 함께 가차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에 대해, 우울증에 대해 이야기하기엔 더 적당한 곳인 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 스코틀랜드를 여행했을 때, 스카이 섬에 갈까 말까 하다가 그냥 인버네스에서 남쪽으로 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애매해서이기도 했지만, 갑자기 그 동네의 압도적인 어두움이 무서워져서 잉글랜드로 도망치듯 내려와버렸다. 혼자도 아니고 가족과 함께였는데도. 인버네스에 가기 전 들린 탄탈론성에서 이유 없이 머리카락이 쭈뼛해지는 걸 느꼈는데, 나중에 어디서 보니 그 성에서 유령이 나온다고 해서 아연했다. 탄탈론성의 유령이 따라왔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여행이 무서웠다고 말하면 문명인의 진술이 아니겠지만, 장소의 ‘기’ 같은 것은 분명 존재하는 게 아닐까.
스카이 섬에 가지 못한 내게, 등대가 있는 섬의 이미지는 미국의 대서양 해변으로 향한다. 우리 가족이 업스테이트 뉴욕에 잠시 살 때 여름 여행지였던 매사추세츠주의 케이프 코드(Cape Cod). 등대 자체는 메인주에 더 많았지만, 어쩐지 케이프 코드의 자연과 하이랜드 등대(Highland Lighthouse)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여긴 섬이 아니라 대서양을 향해 갈고리처럼 튀어나온 곶이다. 케이프 코드 최초의 등대였다는 하이랜드 등대는 해안의 침식 때문에 1990년에 뒤로 위치를 옮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등대는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고, 등대라기보다는 길 끝에 있는 시골집 같은 느낌을 준다. 쓸쓸하지만 낭만적인 풍경이다. 어쩌면 이런 분위기가 영국을 생각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매사추세츠는 ‘뉴잉글랜드’라 불리는 동부 여섯 주들 중 하나이기도 하니..)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스카이 섬과 케이프 코드는 둘 다 대서양의 바닷가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대양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섬이나 반대편 육지에 둘러싸인 내해의 잔잔함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대양의 시원스러운 파도와 광활한 해변은 세상의 끝 같은 장엄한 느낌을 주며 여행자를 감상에 젖게 한다. 내가 대서양을 처음 본 곳은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였고, 그다음이 케이프 코드였다. (난 아직 인도양을 보지 못했다. 언젠가는..)
케이프 코드는 딱히 북쪽도 아닌데 뜻밖에도 땅끝과 같은 느낌이 있었다. 사실 땅끝은 맞다. 미국 동부 사람들의 휴양지로 인기 있는 이 곶은 지도를 보면 대서양을 향해 혼자 튀어나온 지형을 갖고 있다. 유명 휴양지이긴 하지만 해변 자체는 인공적이지 않다. 넓은 사구와 습지가 있는 해안은 은빛 모래와 키 작은 풀들로 덮여 있다. 해수욕객들이 적지 않은 곳인데도 묘하게 인적 드문 공간들이 많다. 곶의 북쪽으로 갈수록 키 큰 나무들은 사라지고 마치 사막을 닮은 듯한 풍경이 나왔다.
<등대로>에서 작가는 작은 섬을 흔드는 대양의 파도소리를 계속 묘사한다. 인간의 흔적이 금방 지워지는 섬이라는 공간은 시간의 승리를 암시하는 장소인지도 모른다. 케이프 코드는 섬이 아니라 곶이지만, 울프의 소설을 생각하며 지도와 사진을 들여다보니 가느다랗게 튀어나와 있는 지형이 섬 못지않게 위태로워보인다. 그러나 사실 미국의 장소들에는 영국과 같은 어둠이 별로 없다. 케이프 코드는 인적 없는 해변에서 약간 쓸쓸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어둡거나 우울한 곳은 아니었다. 그보다 시원하고 이색적인 휴양지에 가깝다. 하지만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를 생각하면서 연상의 흐름에 멋대로 잠기는 것 또한 여행자의 특권 아닐까.
그리고 결국 그 어떤 화려한 장소라도 시간의 힘에 대적할 방법은 없으니까. 케이프 코드의 하이니스 포트(Hyannis Port)에는 케네디 일가의 집이 있는데, 존 F. 케네디의 어머니 로즈 케네디 여사가 1995년 사망한 후 보스턴 소재의 한 연구소에 기증되었다는 뉴스를 읽었다.
- 글을 쓰고 나서 지도를 다시 들여다보니, 스카이섬은 대서양에 바로 면한 섬이 아니네. 스카이섬보다 더 바깥쪽에 있는 두 섬들이 대양과의 접촉을 막고 있다(혹은 스카이 섬을 보호하고 있다?). 뭐 그래도 이 글은 ‘멋대로 연상하기’의 일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