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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별난 Sep 20. 2024

1화 푸른 구슬

Blue Marble

푸른 구슬


'드디어 내 차례다. 팔을 힘껏 휘둘러 내리쳐야 한다. 나는 바닥에 있는 저 푸른 구슬을 정확히 맞힐 수 있다. 할 수 있다.'


"이 얍!" 


"하하하"  


헛방을 치고 저 멀리 날아가는 내 구슬을 보며 자훈이가 웃는다. 그 소리가 온몸의 세포를 찔러 분노가 솟구치고, 피부를 뚫을 기세였다. 얼굴이 새빨개진 것이 분명하다. 짜증과 화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자훈이는 그런 내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잠시 후, 갑자기 웃음기가 사라진 자훈이는 내 구슬을 정확히 맞혔다. 어떻게 그렇게 기를 쓰고 해도 안 되는 것을 자훈이는 늘 쉽게 해 버리는 것 같았다. 자훈이의 구슬은 내리막길을 내려가 보이지도 않았다. 내게 남아있는 구슬이 8개였다. 구슬 두 개 간격이 9걸음만 넘으면 되는데, 자훈이는 마치 내 기세를 꺾으려는 듯해 보였다.


"몇 백개 같기는 한데 8개까지만 받을게. 그리고 앞으로 넌 구슬치기 하지 마. 하하하."


내게 남은 구슬 8개를 다 받으며, 잠시 멈췄던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동안 가까스로 모은 구슬을 다 잃었다.


"도중아 너 이제 구슬 없지? 어두워진다. 그만 집에 가자"


노을이 지는 학교운동장을 등지고 가는데, 머리 위에서 빙빙 날아다니며 따라붙는 날파리떼마저 마치 나를 조롱하는 듯한 소리로 날 비웃는 것 같았다. 자훈이와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10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앞에 가는 자훈이를 바라보며 9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뒤따라갔다. 이렇게 한 마디 없이 집으로 걸어가는 것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자훈이 집과 내 집의 거리는 걸어서 30초밖에 안되고, 자훈이와 나는 기억도 안나는 4살 때부터 함께했다고 한다. 집 거리만큼이나 가까운 둘 사이였다. 그러나 늘 구슬치기를 하고 나면 그렇게 가까운 거리가 절대 좁혀지지 않는 거리처럼 느껴졌다.


"잘 가"


자훈이가 집 앞에서 고개를 돌려 나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나도 인사를 해야 하는데, 아까 자훈이의 웃음소리가 내 귀를 찌르는 듯하다. 난 뜨거워지는 얼굴을 감추려 하며 자훈이 앞을 그대로 무시하고 지나갔다.


"다녀왔습니다"


마루에 앉아있는 형을 지나치며 방에 들어갔다. 다락방에서 구슬이 담겨있는 형의 보물상자를 몰래 열어 푸른 구슬 하나와 쇠구슬 하나를 꺼냈다. 방바닥에 푸른 구슬을 내려놓았다. 난 형이 아끼는 쇠구슬을 들어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방바닥이 깨질 정도로 힘껏 내리쳤다. 나의 목적은 푸른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자훈이 웃음소리를 깨버리는 거였다. 짧은 굉음과 함께 푸른 구슬은 산산조각이 났고, 깨어진 파편들이 내 마음에 박혀 심장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중력에 빨려 들어가듯 고개가 숙여지고 내 눈에서는 눈물 파편이 떨어졌다.


'우당탕 드르륵 쾅!'


마루에 있던 형이 미닫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잠시 후 형은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짓이야!"


'팍!'


형은 고개 숙인 나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지구는 내 머리를 더 당겼고, 나는 깨어진 파편 속으로 쓰러졌다. 맞는 순간 몸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아프게 했던 건 방바닥에 깨진 구슬 파편에 비친 내 모습이었다. 구슬을 모두 잃고 양손에 아무것도 쥐지 못한 채 걷는 내 초라한 모습이 파편에 떠올랐다. 날 비웃는 듯한 아이들의 모습에 위축된 나, 얼굴이 새빨개져 숨으려는 나, 무엇을 해도 안 되는 나의 모습이 푸른빛에 아른거렸다. 나는 그런 나를 부숴버리고 싶었다. 푸른 구슬을 갖지 못할 바에는 산산조각 내고 싶었다. 그러나 형은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날 혼내고 있다. 난 그런 형이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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