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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별난 Sep 24. 2024

2화 소멸

사계절에 흩어진 기억의 파편

소멸


나는 형이라는 행성의 작은 위성처럼 존재한다. 형의 중력에 영향을 받는다. 형이 정해준 궤도를 이탈하면, 형에게 빨려 들어가 나라는 존재는 깨지고 흩어져 사라진다. 나는 형을 중심으로 도는 위성이 되어 사계절을 돌고 돌뿐이다. 방 안에 깨져 흩어진 구슬의 파편에 비친 나는 무엇인가? 사계절에 흩어져 있는 기억의 파편에 비친 형과 나를 바라본다.


봄의 약속


오락실에서 한 판 더하다가 일어났을 땐, 이미 늦었다. 형에게 한 대라도 덜 맞을 수 있다는 희망을 끌어안고 두려움을 제치려 전력으로 뛰었지만 약속한 시간보다 집에 늦게 도착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을 뚝뚝 흘리며 현관문을 떨리는 손으로 잡았다. 


'드르륵'


"다녀...."


퍽!


인사를 다 하기도 전에 난 뒤로 나자빠졌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형이 마루에서 부웅 떠올라 날아 차기로 날 가격했다. 형은 그대로 앞마당에 쓰러져 아파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더 때리며 말했다. 


“약속은 지켜라!”


나는 궤도를 찾기 위해 울음을 그치고 이렇게 말해야 했다.


“응, 알았어. 다시는 안 그럴게.”


이 말은 궤도를 다시 빨리 찾는 방법 중 하나인데 안 하면 더 맞아서 나는 소멸할 수도 있다.


여름의 모기


여름이면 벽지에 피 자국이 많아졌다. 집안에서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기한테 물린 공격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인지 자신이 직접 더 큰 상처를 만들어 덮어 지운다. 형은 물린 부위를 피가 흐를 정도로 세게 긁어 여름이면 팔다리에 상처투성이다. 모기는 나보다 형을 더 많이 공격했다. 모기는 형과 싸우다가 벽을 피의 무덤으로 삼는다. 그러나 나는 이 피가 형의 것인 걸 알기에 집 안 곳곳에서 형의 붉은 피를 봐야만 했다. 형의 손바닥에 맞을 때면 그 피가 내게 묻는 것 같았다. 가려워서 '박박' 긁는 형을  볼 때마다 긴장은 배가 된다. 이때의 궤도를 유지하는 방법은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움직임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안 그러면 모기에 대한 짜증과 화가 나에게 올 수 있다. 이 전투에서 난 모기보다도 못한 존재감을 갖추어야 한다.


가을의 라면


형은 라면이 다 익기 전에, 100까지 소리 내며 세다가 간헐적으로 벽을 ‘퍽퍽’ 치곤 한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유가 중요하지 않다. 그 소리가 나를 긴장하게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숫자 세는 소리가 멈췄다. 라면이 다 익었고 형은 말했다.


“자, 먹자


나는 라면 국물보다 더 진하게 벌게진 형의 주먹을 바라보며 긴장을 못 이기고  "후루룩 딸~꾹" 소리를 냈다.


'꿀~꺽, 큰일이다.'


맞을 준비를 하는데 형은 말했다.


“밥 먹을 때 소리 내지 마.”


'뭐지? 왜 안 때리지?'


그래도 모르니 궤도를 확실히 찾아야 한다.


“응, 알았어. 다시는 안 그럴게.”


밥상에선 안도의 한숨도 속으로 쉬어야 했다. 둘이 같이 먹느니 굶기를 선택하고 싶었다. 이 네모난 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겨울의 손님


이 네모난 집은 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보였다. 내 눈엔 아빠와 엄마도 형의 위성 같아 보였다. 손님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집 안에서 그 누구도 형을 말릴 수 없었다. 동네 어른들이 집에 와서 즐겁게 이야기하다가도 형이 들어오면, 불편해하며 서로 눈치를 보다가 서둘러 나가려 했다. 형이 있을 땐 아예 들어오지 않기도 했다. 간혹 형을 모르는 손님이 앉아서 "얘가 첫째?"라며 인사를 하려 하는데 형은 손님을 무시하고 방에 들어가면서 문을 부서질 듯 닫았다.


"쾅!"


깜짝 놀란 손님은 '쿨럭쿨럭'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일어난다. 형은 그 소리를 놓칠 리 없다. 다시 나와 말한다.


“집은 가족만의 공간이고, 가족이 편하게 쉬는 곳이에요!”


형과 눈이 마주친 손님은 아빠를 한 번 쳐다보며 '으흠' 하며 나간다. 그리고 그 손님은 형이 있으나 없으나 다시는 오지 않았다. 형은 집에서 자기 생각에 벗어나면 누구든지 가차 없이 대했고 그들을 불편하게 했다.


학교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이라는 설문조사 항목이 있으면 항상 ‘형’이라고 적었다. 집은 사계절 내내 형의 세상이었다.  뜨거웠던 여름날 모기는 자유비행을 하고 있었다. 터져 죽더라도 형을 물어버리는 용기도 있었다. 나는 궤도를 이탈할 수 없고 모기보다도 못한 용기를 가진 존재였다. 주사위 같은 이 집이라는 공간은 형이 굴리는 대로 돌아갔다. 굴려 나온 주사위의 눈빛에 내 자유의지는 서서히 소멸되고 있었다. 내 세상의 중심은 놀이터가 아니라 형이었다.


'형이 내일은 어떤 주사위를 던질까? 그 결정에 의해 내일 나의 하루가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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