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죽음 앞에 멈춰서, 하나를 빼내세요
한 장, 두 장, 세 장, 네 장. 네 겹으로 쌓인 기억들. 그 사이마다 책갈피를 꽂는다. 그 장을 넘길 때마다 흐릿한 잔상이 피어나고, 현재와 과거의 기억이 되풀이되며 맞닿는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 것인가?
3+1=4, 4-1=3
모두가 당연히 보는 걸, 나는 보지 못했다.
아니, 나는 당연한 것을 볼 수 없는 눈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더할 것인가?'도 중요했고,
'무엇을 빼낼 것인가?'도 중요했다.
하나가 더해지면,
삶(3)+1=죽음(死, 4)이 될 수 있고
하나를 옮겨 빼내면,
죽음(死, 4)-1=삶(3)도 될 수 있다.
내 삶과 죽음 사이,
대체 그 '하나'가 무엇이었을까?
나는 무엇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저마다 삶을 만드는 자신만의 틀이 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재료도, 만들어내는 모양과 방법도 다 다르다.
그날 샀던 팥 3마리, 슈크림 3마리, 속을 비워 수박을 넣으려던 붕어빵 3마리. 총 9마리였다.
붕어빵 틀 속의 넣는 내용물은 달라도,
그 틀 속에 담긴 열(熱)은 9마리에 다 스며들어가 있었다.
삶의 모양이 하루마다 어떻게 빚어지든,
내가 삶이라는 틀에 꼭 넣었어야 하는 것들은 뭐가 있었을까?
도박할 때는 잘 느끼지 못했던 어휘들이다
내 손으로 수박을 넣었듯 잘못, 후회, 반성은 삶에 매 순간 넣었어야 한다.
세상이 내게 주었던 시간, 순간, 기회를 달달한 슈크림처럼 넣고 맛봤어야 한다.
그리고
붕어빵과 팥처럼 삶에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소중한 사람들의 바람과 사랑을 내 곁에 두었어야 한다.
나란 놈에게는 이 9가지였던 것 같다.
도박을 그렇게 하면서, 바카라 최고의 패-끝수 9(natural nine)-를 가지면 인생도 최고가 될 거라 생각했다. 이 9만 보다가 정작 중요한 아홉 가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도박하기 전에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던 나를 지켜주고 있었던 건, 이 9가지가 느껴지는 순간들이었다. 그걸 이제야 알 것만 같다.
나는 삶이라는 나무를 키워가면서 이 아홉 가지를 뻗어나갔어야 한다. 내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최고의 패 '9'로서 이미 내 곁에 항상 있었다.
여기에 내가 잘못된 한 가지를 더 했다
이제는 내가 만든 10의 의미를 알 것 같다.
9마리 붕어빵에 스며든 열(熱)과 다르게, 내 삶의 열(十)은 인생을 식게 만들었다.
+GO
난 '베팅'을 한 번 더해서 10을 만들었다.
바카라에서 10은 '0'으로 제일 낮은 패가 된다. 그래서 난 도박판에서 늘 질 수밖에 없었다.
+STOP
도박을 했더라도 이 9가지에 '멈춤'을 하나 더했더라면, 인생을 '10'으로 한 끗 더 올릴 수 있었다.
그러면 적어도 누구를 나 때문에 다치게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바카라를 그렇게 하고도, 이 한 끗 차이를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멈출 능력도 없이
베팅을 계속했고
인생을 최악의 패로 만들었다.
GO? STOP?
언제 가고, 언제 멈춰야 하는 걸까?
한 치 앞을 못 보는 내게 이 질문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그래도,
나 살려고 남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는 것,
나 살려고 아이의 팔을 빼는 것,
나 살려고 소중한 이들이 뻗어주는 사랑을 꺾는 것.
이런 것들만은 '멈추고' 살았어야 한다.
그리고 못 멈췄으면 진심 어린 인정과 사과를 '했어야' 한다.
그 정도의 GO, STOP은 했어야 한다. (아니면 도중아! 광이나 팔든가, 아예 판때기 끼지 말든가. 그러면 냉수 한 잔 마시고 속 차릴 시간이나 벌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과거의 기억 중 어떤 것들은 회색처럼 흐릿하고, 어떤 것들은 검은색처럼 선명하다. 때론 선명하고 굵게 남았던 기억이 점차 흐려지고, 흐릿했던 기억이 점점 굵고 선명해진다. 과거와 현재의 기억들이 끊어진 듯싶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현실과 환상 사이를 잘 구분하지 못해서일까?
잊으려고 기억 근처에도 가려하지 않아서일까?
특히, 도박할 때의 기억들은
깊숙이 파고들어 가면, 시간과 기억이 너무 혼재되어 있다.
"아드님, 정신 차리세요!"
"내가 죽는 게 맞잖아... 그래야 끝날 수 있었잖아... 근데... 왜... 왜..."
"정신이 드세요?"
"왜... 으~아~아~아~악"
"정신 차리세요. 어머님, 살아계세요. 병원으로 이송 중이에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를 품은 사랑을 끝내 부러뜨리다
내 생애 가장 끔찍한 날이었다. '나 힘들어요. 그러니 어머니가 먼저 다가와주세요'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현관문을 열였던 그날. 그러지만 않았어도 됐다. 고개를 단 1초만이라도 쳐들고 들어갔으면 됐다. 그러면, 어머니를 붙잡을 수 있었다.
늘 그랬다. 세상을 정면으로 못 보고, 제자리에 있는 내 발만 쳐다보고 살았다.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가슴이 철렁거렸다. 난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주변에 부러져 있는 나뭇가지처럼, 휘어지고 꺾인 채, 쓰러져 있는 어머니를 보고 넋이 나갔다. 다행히 어머니는 나무 덕에 사셨다.
나는 그때 흩어져 있던 나뭇가지들을, 평생 동안 나를 받쳐준 당신의 마지막 가지로 보고 있다. 뭘 해도 안되니 마지막으로 자신을 내던져서 나를 살리려 하셨다.
항상 그랬다. 난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부러뜨리면서 살았다. 당신이 날 받아줘서 산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리고 기력을 좀 회복하시자마자 나를 또 살리려고 아무 말 없이 아파트 담보 대출을 받으셨다.
그때라도 내가 사람이었다면, 깨닫고 변했을 거다. 그러나 나는 짐승만도 못했다.
세 달이 지났다. 어머니가 5층에서 떨어진 그날 사건 이후, 어머니의 도움으로 빚을 어느 정도 해결했다. 잠시 도박을 끊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손에 식은땀이 흥건해지며 소리를 지르는 나를 봤다. 장인어른 방에 들어가 통장을 뒤졌다. 급기야 지안이 돼지저금통을 들었다. 작은 틈 사이로 만원 몇 장을 보는 순간 웃고 있는 나를 느꼈다.
저금통을 깨고 만원 몇 장을 챙겨 나가는 순간,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편안해졌다.
그냥 베팅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평온해졌다.
딸내미의 저금통을 웃으며 털고, 그 돈을 다 잃고 돌아와 잠자는 두 모녀를 보았다. 그때, 내가 생각한 수준보다 심각한 도박중독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날, 난 모든 것에 대한 감정들을 다 도려내버리기로 했다. 늘 마음 한 구석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말하기로 했다.
며칠 후
"나, 나갈게."
"그래. 알았어. 다녀와."
"지안이한테 나 죽은 사람으로 해."
"...?(금세 의미를 알아채고) 흐음. 그래, 그렇게 해. 그리고 너, 이제 우리 둘 앞에 나타나지 마. 넌 지안이한테 아빠라 불릴 자격 없어. 아니, 넌 아빠도 남편도 아니야. 그리고, 넌 아들도 아니야. 어머님한테 미안하지도 않니? 며칠 전, 안방을 뒤지고, 딸 저금통을 깬 거 아실까 겁난다. 넌 사람새끼도 아니야. 그냥 차라리 나가 죽어!"
"네 말이 맞아. 어느 날, 다 어머니처럼 될 수 있어. 이제, 그 누구 곁에 있기 싫어. 이제 그 누구의 그런 모습 다시 보기 싫어. 다신 안 봐. 잘 살아."
난 그 무엇이라도 날 건드리지 않게 하려 했다. 내 손으로, 나와 엮여있는 사랑의 가지들을 모두 부러뜨렸다.
날 더 이상 미화하는 세상 따위 살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그 어떤 이유도 궁금하지 않고, 원인도 중요하지 않다. 내게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차라리 살든 죽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만 생각하며 지내자. 난 그냥 그런 극도로 이기적인 놈이 맞는 것 같다. 도박을 하고 싶어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과연, 주변이 다칠까 봐 걱정하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다. 진짜 내 마음이 뭔지 모르겠다.
무인도에 빛이 꺼지다
세상에 설 힘이 없는데 노력도 안 하고 있었다. 돈만 공짜로 얻으려 했던 게 아니다. 세상을 거저먹으려고만 했다.
내가 약하다는 걸, 그 누구를 지탱할 수 없다는 걸 그리도 인정하기 힘들었던 걸까?
어찌 보면 그렇게 하던 회피, 남 탓, 세상 탓, 자기 합리화도,
내가 살려고 했던 행동들이라는 관점에서 보니 좀 안쓰러워 보이기도 한다. 이미 제일 잘 알고 있던 건 나 자신이었는데.
그런데 그날, 그런 것들마저 포기하기 시작했었구나. 삶에 지금까지 없던 하나가 더해졌던 날이었다.
내가 삶에 더하고, 죽음에서 빼내지 못한 이것.
'삶에 대한 포기'였다.
3+1=4
삶에 이걸 더 하면 죽는 거였다.
4-1=3
살고 싶으면, 삶에 대한 포기를 안 하면 되었다.
수식만큼이나 간단하고 당연한 이 말을 이제야 뼈저리게 느낀다.
그냥 잘 살고 싶으면, 삶에 대한 포기를 잘 안 하면 되는 거였다.
내가 삶을 포기 안 했었다면 병원부터 갔을 것이다. 그러나 난 그러지 않았다.
그냥 도박이 더 하고 싶었던 것이 보인다. 그곳이 짧은 순간이라도 세상 제일 편안한 곳이니까.
지금 보니, 심리와 감정만 문제 삼을 단계가 아니었다.
난 그냥 치료가 필요한 환자였던 거였다. 심각한 병이었다.
너무 늦어지면, 주변에 자신을 병원에 데려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래도 난 기어서라도 무조건 병원 갔어야 했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병원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난 생존할 능력도 못 갖추고 무인도에 내 발로 들어간 것이었다.
부루마블 판
초등학생 때도 형과 부루마블 게임하면 나는 무인도에 갇히고만 싶어 했다. 형이 끌고 가는 이 판에서 벗어나 놀이터 가서 자훈이랑 놀고 싶기만 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날 잡아끄는 형을 벗어날 수 없었다.
삶이라는 판
그 어린 도중이가 내게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난 삶이라는 판에서도 무인도에 숨으려 이리저리 찾았다. 그리고 끝내 자신을 고립시키고 삶을 포기해야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찾은 곳은 죽음이 기다리는 무인도였다.
마지막 기회
무조건 멈춰야 한다
44만 원. 내 인생의 전 재산이다. 난 그 누구에게도 어떤 곳에서도 돈을 구할 수가 없다. 이미 모든 인간관계가 끝났다. 모든 금융권이 막힌 건 이미 오래전이다.
이 돈을 베팅하는데 손가락이 내 의지대로 눌러지지가 않는다. 이 순간을 몇 년을 겪었다.
따도 이 상황은 또 이어진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 잃는다. 도박을 하는 순간, 이 과정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이제는 안다.
맞으면 1분 연명, 멈추면 1시간 연명.
결국 지금 죽냐, 나중에 죽냐이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은 평생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평생 멈출 생각 해도 죽은 삶인 것 같다.
내가 갇힌 이곳이 대체 어디인지 정리가 안된다.
도박을 놓으면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했고, 도박이 오히려 희망이 되어버리는 환상 속에 살았다.
돌아보면 이 환상을 깰 기회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난 그 순간마다 기회인 줄 알 턱이 없었다.
난 어머니 사고 후에도 안 되는 놈이다. 병이 심각해지질 않았던 그때도 못 끊던 나였다.
언젠가 아내가 제안했다.
"단도박 모임에라도 나가봐?"
나는 '나 불법도박했어요'라고 말할 용기가 없어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도박을 더 하고 싶어서 참여를 안 할래'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것이었다.
뒤늦게 단도박협회 사이트를 들어가 수많은 글을 읽으며 눈물을 흘린 적이 많다. 뒤늦게 단도박 모임에 참여하려고 알아보았지만, 지역에 단도박 모임이 운영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핑계일 뿐이다. 설사 있었더라도 참여했을까? 아닐 것이다.
도박꾼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짓 중 하나는, 돈을 딴 과정을 영웅담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나는 모임에서도 그랬을 거다. 그리고 마음이 조금 안정되면, 다시 베팅하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마음에 가진 게 없었으면, 도박으로 딴 돈으로 영웅이 된 환상 속에 살았나 싶다.
계속된 베팅 끝에는 삶의 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ALL-IN
죽음에 나를 던지다
돌아갈 곳이 없다. 더 이상 절망도 희망도 없다. 너무 멀리 왔다.
'지안아, 아빠가 미안해. 왜 여기까지 왔을까.'
마우스를 클릭했다. 결과가 나왔다. 0원을 보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였다. 이건 분노도 절망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통장의 잔고가 계속 줄고 있었다. 전과 다르게 분노보다는 도박의 무서움을 느끼기 시작했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 앞에, 멈춰 서 있는 느낌이 계속되었다. 이 노예 같은 삶이 매일 돌고 도는데, 그저 삶의 끝을 기다리기만 하고 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 그 시간이 온 듯한 느낌이 든다.
도박의 끝
어느 방향이든 도착점은 같다
도박의 끝은 이곳이었다. 한참 동안을 일어서지를 못했다.
평생을 따도 이곳이고, 단 하루만 망해도 이곳이고, 모든 것을 잃어도 이곳이었다.
돈을 따고 잃는 것에 기분만 다를 뿐, 어는 방향으로 가도 이곳에 도착한다.
평생 돈에 이끌리고 살아가는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정신은 피폐해지고 타락하고, 주변을 공포와 죽음으로 몰고 간다.
내 모습이 사람처럼 안 보인다. 이런 괴물은 사라지는 게 맞다.
오래전부터 다음날 눈이 안 떠졌으면 했다.
어김없이 눈은 떠지고, 지옥 같은 하루를 바라봐야만 했다.
오늘 밤은 이 생각이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내 삶에 드리워진 이 어둠의 끝이, 막다른 길 같다는 현실이 늘 무서웠다.
일단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형과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차라리 형에게 실컷 맞고 쓰러지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이 상황이 되니, 갈 수가 없다.
내 머릿속에 이 말만이 맴돌고 있다.
'도중아, 이제 그만하자. 지친다. 제발 주변에 피해 그만 줘라.'
+와 -의 끝
소화능력의 한계에 도달한다
차에 탔다.
그동안 그렇게나 집어 들었다가 섬뜩해서 집어던지기를 반복했던 칼을 들었다.
몇 번의 시도를 통해, 나란 놈은 의식이 있는 한 죽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고 지내왔다.
이런 순간이 오면, 난 그냥 흉내 정도만 하고 끝내는 것이 수순이었다.
오히려, 죽음은 내가 모르는 순간에 찾아올 때가 많았다.
늘 그런 순간이 찾아올까 봐. 그게 늘 무서워 지금 같은 순간에 긴장을 놓지 않았다.
아이러니하다.
무섭다는데 정신줄을 놓으려고 더 미쳤다.
또 막상 그 상황에 도달하면, 그때는 정신줄을 절대 놓지 않으려 한다.
그럴 때마다, 자신을 때리는 나를 수도 없이 봐왔다.
이건 돈을 딸 수록 더했다.
오히려 돈을 잃기만 했을 때가 포기하는 마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소화할 수 있는데 계속 못 먹으면 굶어 죽고,
내가 소화할 수 없는 것을 계속 먹으면 배가 터져서 죽는 법이다.
굶어 죽을 것 같으면,
난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져서라도 연명정도는 할 것이다.
그러나 배가 터지면 살 기회가 없어진다.
소화할 수 없는 돈을 따던 것이 더 위험했었다.
그래서 도박의 끝은 돈이 +가 되든, -가 되든 죽음일 수 있다.
삶과 죽음 사이
이곳은 어디인가?
그런데 이번엔 그 어떤 두려움도 무서움도 안 느껴진다.
오히려, 잠깐이면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난 손목에 올려놓은 칼날을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살려는 의지도 죽으려는 의지도 없는 상태가 몇 분 간 지속되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극심한 피곤함이 오는 것 같다.
이게 의식을 잃어가는 건지, 잠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흘러나오는 나미의 [빙글빙글] 노래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워지는 길목에 서서~우리 사이 멀어질까 두려워~♬
내가 나한테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
'이 세상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다. 나 하나 건사할 힘조차 없는 상태로는, 세상 어디를 가도 마음이 편하게 지속되는 곳은 없다. 결국, 무인도를 가봐야 그곳도 이 지구 안이다. 그 어디를 가도 꼭꼭 숨을 수가 없다. 어떤 곳에도 내가 설 곳이 없다.
더 이상 소중한 이들을 파괴하고 싶지 않다. 여기까지 오게 돼서 모두에게 미안하다. 다들 나에게 그 많던 기회를 주었는데, 단 한 개를 잡지 못했다.
다녀온 세상에는 희망이 없었다. 타락과 쾌락, 불신과 욕심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이제야 보인다.
너무 많이 왔다. 돌아갈 길도 방법도 모르겠다. 나는 내일 또 죽은 숨을 쉬며 살아야 한다. 늘 그렇듯 내일은 눈이 안 떠졌으면 좋겠다. 이런 삶이 지친다. 쉬고 싶다. 또 이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오늘도 눈을 감겠지.'
.
.
.
갑자기 정전이 되듯, 어두컴컴해진다.
그해, 겨울
아직도 그날이 어제처럼 떠오른다.
누군가 가끔 내게 이런 말을 따뜻하게 해 준다.
"그럴 수도 있지.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어."
이 말이 고맙고 따뜻하지만
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지금은 안 하잖아.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잖아."
이 말을 들으면 고맙고 위로가 되지만
난 들을 자격이 안된다
그렇게 얘기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도 죄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큰 피해를 주었다. 다 무시하고 내팽개쳤다.
어머니의 마음을 무너뜨렸고,
자훈이의 다리를 잃게 하였고,
지안이의 날개 한쪽을 잃게 하였다.
이 사실을 한 발자국도 피하면 안 된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속죄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적어도 나는 단 한순간도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잘못할 때마다 반성, 후회를 더 깊게 하고 살았어야 한다.
그때 그 속이 한가득했던 붕어빵 9마리를 삶에 가득 채웠어야 했다.
"후~우, 안녕하세요. 늦게까지 하시네요."
"(반갑게 맞으며) 손님 기다리고 있었죠."
"저를요? 저, 처음 오는데...(순간 농담인 것을 알아채고). 지금까지 이 추운 날 고생하시는데, 아직도 그런 농담도 하시고, 대단하세요. 하하하. 여기 팥 3마리, 슈크림 3마리, 그리고 아무것도 넣지 말고 3마리 주세요."
"...? 오케이. 그럼, 3마리에 안 넣는 만큼 6마리에 더 듬뿍 넣어드려야겠다. 하하하."
< 4-2부에 계속>
다음 이야기 예고편
그 붕어빵 6마리에 슈크림과 팥이 가득했던 것처럼,
내게는
세상이 준 시간, 순간, 기회,
소중한 사람들의 바람과 사랑이 가득했었다.
이제 40에서 49까지 진행된 4로 시작한 이야기를 멈추자.
이제 5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삶(3)에서 죽음(死, 4)을 지나 +1 해서 오(5)늘로 나아간다.
50화: Life, +1, Death
4-2부
삶과 죽음 사이에 잠시 멈춰 서서 , (쉼표)를 찍고 그 한 끗 차이를 바라본다.
51화: Life +1 4-3
4-3부
그러면 삶은 이제 하나처럼 연결될지 모른다. 삶을 한 번 더 선물 받았다. 이제 이 의미를 찾으러 가야 한다. 힘들어하며 자책하고, 세상탓하며 지체할 시간이 없다. 지난 시절, 죽어있던 시간의 의미를 다 살려내야 한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었고, 나에게로 마무리 져야 한다.
절대 마무리되지 않을 그날까지, 난 절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52화: 마지막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벗어나는 방법을 나는 아직도 잘 모릅니다.
그래도 전 이 작업을 계속합니다.
당신이 있는 그 음지 끝에 이 글이 닿을 가능성이 희박한 것도 압니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확실히 답해줄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 상상할 수도 없을지 모르지만,
당신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제 그만 자책하시고 이 대지 위에 서세요.
주변에 고통받고 있는 마음들을 봐야 합니다.
이건 당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죽음(死, 4)에서 삶에 대한 포기를 빼내면 삶(3)입니다.
그러니,
절대 삶을 포기하지 마세요.
힘내세요.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