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뱅이(회전무대)-나와의 만남
1. 돌고 도는 감정
어느 날 같이 일하는 동생과 점심시간에 대화를 나누었다. 백지상태로 듣기를 하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날 동생의 이야기를 집에 와서 공책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간 동생의 무거운 삶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감정은 비단 동생만이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어떤 이가 겪었고, 또 어떤 이가 겪고 있고, 또 어떤 이가 겪을지 모르는 것이었다.
공책 그림 또한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감정이었다란 걸 알게 되었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다니는 외로움. 등대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 두려움. 벗어나고 싶지만 늘 빙빙 돌아 제자리일 것 같은 불안감. 휘향 찬란한 세상을 동경하는 부러움. '이제 알았다. 깨달았다.' 하지만 착각인 걸 알았을 때 찾아오는 허무함.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이 부정적 기운은 쌓이고 쌓이기만 한다. 그리고 되풀이되는 삶 속에 피할 수 없는 고난, 역경에 대한 회피. 자기 행동의 결과에 대한 변명과 합리화, 핑계와 외부 탓. 무력한 자신에 대한 열등감. 이런 상황은 나의 귀를 막고 나의 눈을 가린다. 그렇게 내 안의 세계에 빠진다. 이제 감각기관들은 온전한 세상을 느끼기가 힘들다. 그리고 뭔가 기적 같은 계기가 나를 찾아오길 바란다. 그러나 기적은 어김없이 나를 피해 다닌다. 난 이런 상황의 연속됨이 당연한 삶이라 여기는 습관에 빠져버렸다. 난 그렇게 뱅뱅이 안으로 들어갔다. 뱅뱅 돌고 도는 이런 감정에서 빠져나오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꽤 긴 시간을 그리 보냈다. 그 무엇도 받아들이질 않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다른 이들의 말이 들어올 손톱만큼의 틈도 열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런 나의 모습은 나를 진정 아껴주는 사람들마저 두 손 두 발 들게 하였다. 다들 그렇게 나를 위하다 지쳐갔다. 내가 그들에게 건네준 건 그저 안타깝게 날 바라보게 하는 거였다. 개중에 더러는 날 떠나기도 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헤르만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말이다. 뱅뱅이가 마치 알처럼 보인다. 뱅뱅이라는 알을 깨뜨리려면 -그 속에서 빠져나오려면-그냥 설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말은 쉽다. 그런데 이 뱅뱅이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 돌아간다. 느려지질 않는다. 느려지긴커녕 점점 가속도가 붙는다. 너무나 빠른 속도에 세상은 뒤죽박죽 일그러져 보인다. 그 변화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이 속도는 날 어지럽고 혼란스럽게 한다. '지치고 힘들다. 고통스럽다. 행복하지 않다.' 이 감정들이 멈춰지길 바라지만 멈춰지지 않는다. 원심력을 이기려는 생존 본능에 손마저 놓을 수가 없다. 찢기고 다치지만 손을 놔버리면 튕겨 나갈 수도 있을 텐데 그마저도 허락지 않는다. 난 그런 깡조차 없다. 생존본능마저 지쳐가며 외로움이 밀려온다. '누구라도 함께 있다면 이 외로움이 덜해질까?' 그런데 속도가 너무 빨라 그 누구도 들어오기 힘들다. 그러려면 그가 찢기고 다쳐야 한다. "친구야! 괜찮아? 너 힘들어 보여. 그만 가자. 집(세상)에 갈 시간이야." 끊임없이 도와주려는 소리는 뱅뱅이의 속도에 다 튕겨져 나간다. '대체 왜 안 멈추는 거야? 누가 밖에서 계속 돌리고 있나? 대체 왜? 왜? 나한테 왜 이래?' 나가고 싶다. '그래 나갈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좋은 생각을 하고 또 해보아도 결국 난 또 뱅뱅이 안이다.
끊임없이 나름대로 투쟁하지만 나갈 수가 없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투쟁한다. 의문점을 계속 던진다. '왜 계속 도는 건데? 이해가 안 되네.' 그래도 돈다. 또 던진다. '왜 계속 도는 건데?' 그래도 돈다. 그래도 또 던진다. '왜? 왜?' 이 질문을 언제까지 던지란 말인가? 도대체 누가 자꾸 돌리는 건데? 너 누군데? 그만 돌리라고.'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너무 빠른 속도에 뱅뱅이를 돌리고 있는 무언가의 형태가 안 보인다. 흐릿하게 보이기만 해도 좋으련만 아예 안 보인다. 너무 지친다. 힘들다. 그러다 생존본능도 지쳤는지 손이 놓아지려 한다. 이윽고 놓아졌다. 그 순간 그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다름 아닌 나였다.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뱅뱅이의 속도는 여전히 빨랐지만 난 두 손에 힘을 더 꽉쥐어 기둥을 끌어안았다. 눈을 감고 더 이상 어지러운 세상을 보지 않았다. 이 눈물이 멈출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나가고 싶어 하는 것도 나였고 못 나가게 하는 것도 나였다. 세상이 시시각각 변하고 일그러져 보이는 것은 내가 돌면서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계속 돌리고 있던 건 나였다. 그렇게 나를 이분화할 수 있는 순간이 왔고 난 눈을 떴다. 뱅뱅이의 속도가 현저히 줄어 있었다. 이제 온전한 세상을 맞이할 차례이다. 드디어 난 이 지긋지긋한 뱅뱅이를 내렸다. 너무 오래 돌아서인지 내려서 본 세상 역시 어지러워 보였다. 그렇게 맞이한 세상에 또 휘청거리며 쓰러질뻔했다. 그 세상은 거의 모든 것이 망가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난 쓰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