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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Jul 24. 2023

그래도 아이들이 좋아서

아무리 아프고 공감 가는 이야기도 반복하면 피로감이 느껴진다는데, 한 번은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어서 나도 그 행렬에 동참한다. 처음 서이초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먹먹해서 말이 나오질 않았고 내 감정의 정체도 모호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으면 말도 나오지 않는 것처럼 무엇인가 말을 하기는 했지만 내 마음 상태가 잘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이 흐르고, 하루가 더 흐르고, 그제야 흐릿했던 감정의 선이 보였다. 슬픔, 분노, 비참함. 그리고 비겁했던 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 거기에 무기력함과 우울감까지. 이 모든 감정을 이렇게 한 번에 겪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몰랐다.


16년 전에 6학년 중간 담임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6개월간 파견 연수 후에 복직하게 된 새 학교에서는 나에게 6학년 담임을 주었다. "좀 힘든 반이에요."라는 말과 함께. 이미 내가 복직할 것을 알고 있었는데 돌아올 나를 위해서 6학년 담임 자리를 이미 비워두고 있었던 것이다. 1학기 담임 선생님이 휴직이나 퇴직을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1학기 담임을 위해서 6개월 기간제 선생님을 뽑아두었고, 그 선생님은 9월 발령으로 타시도 교육청에 속한 학교로 가셨다. 그해는 정말로 난생처음으로 하루하루 날을 지우면서 지냈다. 1학기 담임 선생님을 내가 밀어냈다고 생각한 사춘기 여자 아이들의 증오와 적개심, 원래도 공격적인 행동성향이 있었던 남자아이들의 폭력적인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래도 버틸만했던 것은 학부모님들 대부분이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서 아시고 노력하시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합리화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그래도 나에게 폭언과 협박을 하시는 분들은 없었다. 그리고 동학년 부장님께서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시고 도와주셔서 겨우겨우 그 해를 버틸 수 있었다. 그 해의 제자들이 가끔 찾아온다. 물론 그 아이들은 아니고 다른 아이들인데, 본인들이 생각해도 그 아이들의 그 행동은 정말 너무하고 어린 마음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나눈다고 전해 들었다.


네 번의 출산과 육아로 인한 대략 10년 간의 육아 휴직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고, 더 격해진 학교 현장을 맞이하게 되었다. 교실 문을 꽝 밀치면서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엄마에게 달려가는 아이부터 친구들의 물건을 밖으로 던지고는 나 몰라라 하는 아이, 소리를 지르면서 책상을 발로 차는 아이 등등등... 우리 반의 반 이상이 내게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나중에 서너 명씩 분반을 해서 올려 보냈는데 모든 담임 선생님들이 나에게 찾아오시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 서너 명이 각 반의 대표주자였던 셈이다. 이런 힘든 일이 한 두 해를 걸러서 발생하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교직이 좋다. 가끔은 머리가 너무나 터질 것 같고, 아이의 툭 던지는 말이 쌓이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도 하지만 "선생님"하는 그 한 마디에 마음이 스르르 녹아버리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다 애정과 관심을 필요로 한다. 다만 기다릴 뿐이다. 우리 반에는 나 말고도 24명이 더 있기 때문에 선생님이 나 하나만 데리고 놀아줄 수도 없고 나에게만 토닥여주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기다리는 것이다. 별거 아닌 땅따먹기도 아이들이랑 할 때보다 선생님이랑 할 때가 더 재미있고 마피아 게임도 선생님이 있어야 더 웃기다. 밥 먹을 때 선생님이 무슨 반찬을 더 잘 먹는지 슬쩍 쳐다보고 "선생님 선생님!"하고 불러서 "왜?" 하면 "그냥요." 하고 조금 있다 또 "선생님 선생님!"하고 불러서 "왜?" 하면 또 "그냥 불러봤어요."라고 대답한다. 집으로 바로 가도 되는데 괜히 학원 시간 남았다는 핑계로 교실에서 굴러다니기도 하고 텃밭에 같이 가자고 조르기도 하는 것이 우리 반 아이들이다. 우리 반은 6학년이다. 6학년도 똑같이 어리다. 내가 사랑을 주는 만큼 표정이 달라진다.


그런데 좀 힘든 일이 있었다. 역시 학부모의 문제였다. 학교에서 잘 생활하고 간 아이는 집에만 가면 머리가 아팠고 속이 울렁거렸고 어지러웠다. 아이 어머니는 아이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정말로 큰 일이었기에 충분히 공감하고 온갖 노력을 다 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발표도 잘하고 아이들과 잡기 놀이도 잘하고 밥도 잘 먹고 웃기도 잘 웃었다. 학교 밖에서 일어난 사건이 원인이었는데 그 일로 인해서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장감님과 회의를 하고 수업을 하고 교과 시간에는 해당 학부모님과 상담에 에너지를 쏟았다. 오후에 아이들이 하교하고 나면 다시 회의를 하고 상담을 했다. 저녁에 통화하고 문자연락을 주고받는 일도 잦았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니 내 삶이 피폐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집 아이들은 방치가 되었고 나는 내가 하는 말 하나라도 빌미를 제공할까 두려워졌다. 나중에는 나에게도 공격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교육청에 나에 대해서 불평하고 협박하는 일도 있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교장선생님께서 다 막아주셨다. 장학사의 전화에도 너무나 잘 말씀해 주셔서 장학사가 도리어 수긍하셨다고 들었다. 교장 선생님은 이런 말씀까지 해 주셨다. 만에 하나라도 선생님이 아동학대로 고소당한다면 내가 사비를 들여서라도 변호사를 선임해 주겠다고. 이런 관리자가 계시면 무너질 수 없다. 나라고 병가를 내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우리 집 아이가 너무 아팠던 날 나도 같이 아파서 딱 하루 병가를 내었을 뿐, 다시 오기로 힘으로 학교를 갔다. 그렇게 한 학기를 마치고 나는 아이들과 사제동행 활동을 했다. 한 학기 동안 더 마음을 쏟아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으로 방학하고 시간을 내어서 아이들과 방탈출카페도 가고 보드게임 카페도 갔다. 2학기 때는 조금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평생 기억에 남을 6학년이 될 것 같다는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먼저 간 선생님 생각이 났다. 교직은 아픔과 고통도 많지만 또 기쁨과 희망도 많다. 분명히 알고 계셨을 텐데 삶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서 견디기 버거웠을 것이다. 교사로서의 보람을 누리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현실이 참 아팠다. 어려워도 한 편에서만 지지해 줘도 견딜 수 있다. 이 아이들이 좋아서 머무르는 교사의 삶을 부디 계속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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