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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Aug 12. 2023

느리게 가는 것이 가장 빠르게 가는 길이에요

피아노 레슨을 받다가

방학을 앞두고 시작한 피아노 레슨이 이제 반을 지나갔다. 총 10회권을 끊었으니 5번을 받았는데 아직도 악보 3페이지를 계속하고 있다. 친한 친구는 의구심을 갖고 물었다.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말이지, 어차피 건반을 치고 소리가 나는 것은 동일한 원리잖아. 그런데 그렇게까지 손가락 모양을 교정을 받고, 손모양을 아치형태로 만들어야 하고 손목 자세를 다 고쳐야 한다고?" 그 친구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시다. 


어린 시절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는 당연히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었다. 그러나 내 친구는 정말로 피아노가 너무너무 싫었고 몇 년을 가르쳐도 도저히 다음 곡으로 넘어갈 수 없자 어머니는 피아노 대신 바이올린을 가르치려 했으나 바이올린 선생님도 포기하고 떠나가셨다나. 하여튼 그렇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엄마가 피아니스트였다면 나는 너무너무 행복했을 텐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정말로 행복했을지도 어쩌면 엄마와 엄마의 무수한 제자들을 보면서 비교하다 좌절을 느꼈을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친구의 반복되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단순한 도레도레를 제대로 치기 위해 레슨의 몇 십 분을 모양교정과 힘을 빼고 손가락 끝에만 힘을 넣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 할애를 하고 메트로놈을 40으로 맞춰놓고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나라고 왜 빨리 가고 싶지 않겠는가. 이 곡은 알레그로이다. 빠르게로 쳐야 하는 곡을 모데라토(보통 빠르게)도 아니고 안단테(느리게)도 아니고 라르고(느리게)이다 못해 가끔은 렌토 (매우 느리게)의 수준으로 치고 있으니 어느 세월에 이 곡을 끝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치솟아 올라 한숨이 저절로 나올 때가 있다. 레슨을 받기 전에는 내가 이 정도로 다 뜯어고쳐야 하는 수준이라고 생각을 안 했기 때문에 더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선생님은 단호하셨다. "저도 어느 정도 선에서 마무리해 드릴 수 있어요. 사실 지금도 끝내자고 하면 그럴 수 있고요. 하지만 여울님이 작정하고 오신 것 같기 때문에 저도 정말 제대로 가르쳐 드리려고 해요."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차마 "네. 그냥 적당히 끝내주세요."라고는 죽어도 말 못 하겠다. 그럼에도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빨리 움직일 때가 있나 보다. 한 박자에 100으로 가도 빠르지 않은데 한 박자를 4개로 쪼갠 16분 음표를 박자당 40으로 놓고 천천히 손가락 관절을 펴고 구부리는 연습을 시키시던 그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많이 답답하시죠? 그렇지만 느리게 정확하게 가는 것이 가장 빠르게 가는 길이에요." 맞다. 알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음을 비운다. 예전에는 빠르고 정확하게 치기 위해서 템포를 느리게 잡으면서 빨리 올렸다면 지금은 정확하게 손가락 모양을 잡고 힘을 빼서 공명하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 템포를 느리게 잡는다. 섣부르게 템포를 올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다음 레슨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치 내 친구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으신 것 같이 말이다. "이렇게 쳐도, 저렇게 쳐도 똑같이 소리는 나요. 그렇지만 손가락 끝으로 땅 하고 때리는 것과 손가락 끝부분에서 살며시 쓸어서 오는 것과는 소리의 결이 달라져요.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선생님은 계속 말씀하셨다. "피아노 건반을 칠 때는 사랑하는 사람을 어루만지듯이 치라는 말이 있어요. 부드럽게 쓸어서 와야 된다는 뜻이지요."


부드럽게 쓸어 오는 연습을 또 일주일 넘게 했다. 빠르게 트레몰로로 쳐야 하는데 16분 음표들을 언제 다 일일이 쓸어오고 있나 싶지만 느리게 쓸어오면서 때리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 천천히 반복해서 연습을 한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 레슨에서 처음으로 속도를 올려도 좋다고 하셨다. "이제 50부터 5씩 올려가면서 100까지 연습해 오세요. 안 되면 다시 반복하면서 100까지 만들어 오세요." 이번 주 과제는 트레몰로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 포함이다. 그동안 논레가토로 쳐야 하는 줄 알았는데 트레몰로는 레가토였다. 미리 떼지 말고 다른 음을 먼저 누른 다음 먼저 친 음을 뗄 것. 다른 것들은 괜찮은데 트레몰로와 레가토는 연관하여 생각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또 다른 난제였다. 나도 모르게 다각다각다각하면서 치고 있는 것이다. 굳이 문자로 표현하자면 다라다라다라다라 정도가 되어야 할까. 


아마 이번 과제를 해 가면 또 다른 과제가 나올 것이다. 어쩌면 이 짧은 3페이지 안에 이토록 수많은 과제가 곳곳에 숨어있는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하나하나 클리어해 가는 것도 재미있다. 분명히 레슨 때는 안 되었는데 하다 보면 어설프게 흉내는 내어진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조금씩 다듬어져 가는 이 기분이란. 생각해 보니 정확하게 느리게 가는 것이 어설프게 빠르게 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벌써 한 달이 지나는 사이 달라진 나를 보게 된다. 이 느린 발걸음이 쌓이고 쌓여서 6개월이 지날 무렵인 이번 겨울에는 또 다를 것이고, 1년이 지난 내년 여름에는 또 다를 것이고, 그렇게 10년이 지난 쉰셋의 여름에는 또 다를 것이다. 나에겐 비록 20대처럼 젊음과 시간과 에너지는 넉넉하지 않을지라도 그래서 오히려 느리게 갈 수 있으니. 다시, 렌토로, 라르고로, 아다지오로, 그렇게 느리고 우아하게 가다가 가끔은 알레그로로, 프레스토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목적없이 허둥허둥 달리는 서두름이 아닌 방향성을 지닌 우아하고 기품 있는 쾌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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