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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Aug 13. 2023

미치게 그리워서

피아노와 함께 했던 내 첫사랑 이야기

지난 한 주 소재가 빼곡한데 그 빼곡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다 담아내자니 오늘은 좀 쉬어가는 페이지처럼 아무 생각 없이 비워보고 싶었다.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것이 글로성장연구소에서 제시해 주는 가이드. 여러 가지가 있는데 주욱 스크롤을 내리다가 노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미치게 그리워서'. 처음 듣는 노래지만 어떤 노래인지 알 것 같다.



나에게 미치도록 그리운 사람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애증의 첫사랑일 것이다. 사실 지금은 그렇게 미치게 그립지는 않지만 그 1년이 넘는 치열한 사랑과 헤어지는데 필요했던 몇 배의 시간들이 20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그리고 드문드문 30대와 40대까지도 흔적을 남기는 것을 보면 참 미치게 아픈 사랑이긴 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나의 첫사랑은 대학교 2학년 말에 찾아왔다. 1학년 때 찾은 합창동아리에는 졸업한 선배들이 자주 찾아왔다. 그때 우리 동아리는 인원이 줄어들어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졸업한 선배님들은 정말 스스럼없이 자주 오셨고 그래서 재학생들과 어울리는 일도 많았다. 어느 날 누군가 동아리실의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어색하게 인사를 하는 나와 동기에게 졸업한 몇 학번 누구라고 알려주셨다. 선배들한테 밥을 사달라고 부탁하는 거라고 배웠던 나는 세 번쯤 선배를 뵈었을 때 "저희 밥 사주세요!"라고 용기 있게 외쳤고 나와 동기는 파파이스에서 버거를 하나씩 먹었다. 선배는 당시 '이 발칙하게 밥 사달라고 하는 아이들이 궁금하니 어디 한 번 사 줘 보자.'라는 마음이었다고 나중에 이야기했다. 그 후로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방학 연습이나 MT 때 (우리는 졸업한 선배들도 같이 갔다) 마주치면서 마음이 조금씩 커져갔고 동아리 주소록 정리를 핑계 삼아 나는 선배에게 한 번 더 전화를 걸었다.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나를 스치던 몇몇 분들과 소위 말하는 '좋은' 만남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순간들이 다 성사되지 않았던 것은 내 마음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나중에사 알게 되었다. 그 추웠던 겨울, 우리는 강남에서 만났고 밥과 차를 어디에서 먹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강남역을 향해 걸어가던 그 큰길에서 그가 내 등에 살짝 손을 올린 것은 지금도 낙인처럼 뜨겁게 기억이 난다. 도대체 이 의미가 무엇인지 그냥 습관인지 아니면 정말 나에게 마음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애를 끓이다가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른 언니들이나 후배들에게도 이렇게 하세요?" 선배는 모호한 태도로 "이게 오늘의 가장 중요한 질문인가."라고 말했다. 그 질문을 던지기 위해 수많은 용기를 그러모아야 했기에 정작 그다음 대답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대답은 "그렇지 않다."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날부터 행복하고 아프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를 떠올리면 피가 마를 것 같이 떨리는 그 연애가 1년간 지속된다. 우리는 함께 피아노를 쳤으며 음악을 나누었고 연주회에 같이 갔다. 나에게 다양한 연주자들의 다양한 음악을 알려준 것은 그 선배였으며 피아노의 세계를 확장시켜 준 것도 그였기에 그렇게 내 첫사랑은 나의 1년을 빼곡하게 채워갔다. 대학원에 합격하면서 주 2회씩 학교에 오면서 우리는 학교생활의 동선까지 같이 겹치면서 더 내 삶에는 그가 가득했었던 것 같다.


그는 나에게 목걸이도 주었고, 교생실습 때는 정장이 필요하다며 쇼핑몰에 데려갔으며, 생일에는 예쁜 시계를, 해외여행을 갈 때면 그 나라의 여러 가지를 나에게 사다 주었지만 반지만은 주지 않았다. 갖고 싶은 것이 있냐는 질문에 나는 커플링이 끼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반지는 영원한 서약을 의미할 때 나누는 거야."라고 대답했다. 가장 작은 반지였지만 나는 그에게 반지를 나눌 대상은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은 더 커져갔고 나는 난생처음 그의 손편지도 받았다. 너와 계속 함께 하고 싶다는. 그래서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는. 아마 1년만 더 연애를 했으면 반지를 받았을까?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서로가 싫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헤어지는 그날까지도 너무 좋아하는데 함께 할 수가 없어서 계속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의 붉은 눈시울도 기억이 난다. 아마 헤어진 이유가 '싫어서'였다면 매우 드물게 나가지만 동아리 행사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 그가 나와 대화하기 위해 따라 나오거나 서로가 아는 그 눈빛을 던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저 아래쪽에 묻어 두었던 아픈 기억이 문득 생각나서 글을 쓰려니 다시 마음에 불이 이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각자 가정을 다 이루었고 서로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일은 없으며 동아리 행사도 나는 잘 가지 않기 때문에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마흔의 나이에 생각해 보면 미치도록 그리운 것은 서로서로가 아니라 20대에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던 당시의 나와 당시의 그, 그리고 함께 나누었던 우리의 음악과 그에 대한 열정이리라 여겨진다. 그리운 첫사랑은 갔지만 서로가 주었던 좋은 것은 여전히 남아있다. 아직도 그가 많이 좋아하는 베토벤과 쇼팽의 악보를 펼 때는 조금 더 용기가 필요하고 그가 좋아했던 스비아토슬라프 부닌과 에밀 길렐스의 음악은 조금 덜 손길이 가고, 샹송 프랑소아의 쇼팽 연주 시디를 볼 때면 "잘 치는데 가끔 틀린다."라고 웃음기 섞인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지만 그래도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켰으니 되었다. 그래서 내가 만났던 여러 사람들 중에서 여전히 '미치게 그리워서'라고 하니 떠오를 수 있나 보다.




이렇게 오늘의 회상은 끝. 다시 나는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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