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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Aug 22. 2023

앙상블이란 정말로 어려운 것

너와의 연주도 나와의 연주도

오랜만에 피아노 듀오 연주회에 다녀왔다. 지금도 참 좋아하는 예전 피아노 선생님의 피아노 듀오 리사이틀이었다. 


선생님은 피아노 듀오 연주를 즐겨하시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여러 팀이 공동으로 하는 듀오는 연주자의 비용 부담과 노력 부담이 독주회보다는 적게 든다. 신랑이 성악가라서 독주회를 여러 번 했는데 정말 그 비용이 엄청나서 결국은 그게 다 빚으로 돌아왔다. 기본적으로 홀을 대관해야 하고, 피아노 조율 비용에 팸플릿 인쇄비용과 연주회 당일 안내 직원들에 대한 수고비며 조명 및 녹화 비용에 반주자 수고비까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몇 백이고 천만 원이 나가는 것은 우습지도 않다. 요새는 작은 홀도 많지만, 대학교수에 지원하려면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금호아트홀 같은 좀 유명한 홀에서 해야 인정해 준다고 해서 처음에는 무리해서 그런 홀을 대관했더니 비용은 더 많이 나갔다. 티켓을 팔아서 비용을 충당하면 오죽 좋으랴마는, 요새는 티켓을 공짜로 줘도 오지 않는 것이 클래식 음악회이다. 정말 조성진과 같은 유명한 연주자가 아닌 이상 무명 연주자의 연주회는 사실 지인들로 채워지는 것이 정석이다. 와 주시면 정말 감사할 뿐이다. 


그래서 정말로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이 따로 있지 않는 이상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것이 음악회 주최이지만, 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다. 어느 정도 하지 않으면 연주 실적이 채워지지 않아 인정이 되지 않는다. 일반 대학교의 교수들이 연간 몇 편 이상 논문이나 연구 실적을 꾸준히 내야 하는 것처럼 연주자들에게는 연간 연주 실적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연주회에 참여하는 인원의 숫자만큼 점수도 다르다. 보통 독주회를 가장 높게 쳐 주고, 2인, 3인 이렇게 늘어나는 수만큼 점수는 n분의 1이 된다. 그래도 연주 참여 횟수가 많을수록 좋고, 비용 부담과 노력 부담이 적고, 준비하는 부담도 적으니 공동 연주회를 선호하시는 분들도 많다. 


다만 이런 연주회는 위험 부담이 크다. 연주자도 그러하겠지만 청중의 입장에서도 크게 마음을 먹고 가야 할 때가 있다. 전설적인 피아노 듀오 연주팀인 라베크 자매 같이 호흡이 환상적이지 않는 이상 두 명 이상의 연주자가 완벽하게 호흡을 맞춰 하나의 곡을 연주하기란 너무나 어렵다. 거기에 포핸즈처럼 한 대의 피아노에 두 명이 나란히 앉아서 하면 조금 더 호흡을 맞추기가 수월한데, 피아노를 마주 놓고 앉아서 치려면 서로를 보는 것도 쉽지 않아서 정말 동물적인 감각에 맞춰야 하기에 난이도는 두 배가 아닌 몇 배로 올라간다. 예전에 내가 포 핸즈가 아닌 듀오로 할 때 지도 선생님은 마주 보는 형태가 아닌 나란히 놓는 형태로 하셨다. 그나마 나란히 피아노가 붙어 있어야 호흡 맞추기가 쉽다고 하셨다. 연습할 때는 뭔가 폼이 안 나는 것 같아서 살짝 불만이었는데 정말로 무대 위에 올라가 보니 마주 보는 형태라면 더 정신이 없었겠다는 것을 실감하고 급 겸손해졌던 기억이 난다.


호흡까지는 그래도 나처럼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 연주자들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듀오에서 가장 큰 문제는 나를 드러내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주선율을 살리고 보조 선율이 조화를 이루게 하려면 나의 기교와 실력을 과시하기보다는 음악을 먼저 생각하고 비록 내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어우러짐을 표현하려고 해야 하는데, 막상 무대에 서면 나를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가 보다. '나 이만큼 쳐요'라고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연주자들이 참 많았다. 그런 분들이 팀을 이루면 내가 여기에 왜 와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주에 다녀온 선생님의 연주회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내가 우리 선생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본인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항상 음악을 먼저 생각하시고 세컨드를 주로 하시는데 그 반주와 페달링이 너무나도 절묘하여 더 풍성한 음악을 만들어내셨다. 그래서 선생님의 순서는 늘 안심이다. 그런데 역시 중간 부분에 너무 아쉬운 연주팀이 있었다. 하필이면 가장 화려하고 어려운 곡으로 선곡을 하셨는데, 딱 처음 몇 마디를 듣자마자 너무 걱정이 되었고, 그 팀이 하는 두 곡은 끝까지 듣는데 참 쉽지 않았다. 연습 부족으로 미스 터치도 많았고 서로를 과시하려고 자신의 선율을 드러내려고 했으며 서로 박자도 잘 맞지 않았다. 마지막 음을 듣는 순간 이제 끝났다는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래서 앙상블 전문 연주자들을 존경한다. 나를 비움이 너무나 여실하게 드러나는 장르가 앙상블이다. 그리고 다른 이의 소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음악을 이해를 해야 비율이 잘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앙상블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꼭 두 명의 연주자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나는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 끝까지 깊게 누르는 습관이 있다. 초등학교 때 가르쳐 주신 선생님은 야무진 소리를 좋아하셨다. 그래서 건반을 끝까지 누르는 습관이 생겼는데, 문제는 그렇게 하다 보니 소리가 항상 강하게 나오고 그래서 듣는 사람이 부담스러운 음악이 되기가 쉬웠다. 뭔가 빠르게 잘 치는 것 같은데 음악이 급하고 아름답고 편안하지가 않은 것이다. 요새 힘을 빼는 연습을 하면서 내가 치는 음악에 좀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자꾸 강해지려는 엄지 손가락을 독립시켜서 부드럽게 누르기, 아직도 서툰 왼손 손가락들을 독립시켜서 주 선율과 보조 선율에 적절한 강도와 기법으로 가기를 중점적으로 연습한다. 결국 나 자신 안에서도 앙상블을 먼저 이루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나 스스로의 강약과 어우러짐을 먼저 조절하고 표현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과의 앙상블은 훨씬 더 어렵겠지. 무조건 강하게도 무조건 약하게도 아닌, 적절하게 강약중강약을 표현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니 말이다.




하이든 소나타 1악장을 정말 1년 가까이 쳐 오면서 그동안 내가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무엇을 보려고 했는지 오늘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다. 단순하게 곡을 하나 끝내고 '완곡'했다는 성취감만 느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기본적인 조화를 표현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 내가 이 곡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깊게 파고들어야 진짜 이 곡이 완성이 되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빨리 완주하려는 욕심은 진즉에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또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나 보다. 다시 마음을 비우고, 이 몇 마디를 반복하고 반복한다. 그렇게 작게 쪼갠 단위들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조금 더 큰 단위로 묶고 더 묶으면서 한 곡의 전체적인 흐름이 이어지도록 노력한다. 길게 가는 호흡, 전체를 아우르는 안목, 하나로 끝까지 갈 수 있는 일관된 방향성까지. 생각해 보니 음악은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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