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와 도서관에 갔다. 큰 아이는 밀린 숙제가 많다며 학원에서 운영하는 스터디카페에 갔고, 셋째는 야구 시합과 훈련을 지쳐서 쉬고 싶다 했고 넷째는 가기 싫다고 징징 거리길래 집에 있으라고 했다. 나도 오늘은 좀 힘에 부쳐서 출발이 늦었더니 둘이 같이 머무른 시간은 한 시간이 채 안 되겠지만 그래도 갔다.
제일 먼저 한 것은 둘째 이름으로 도서관회원증을 만들어 준 것이다. 반드시 홈페이지 가입을 먼저 해야 한다는데 14살 이하는 본인 인증과 부모 인증이 필요하고, 본인 핸드폰으로만 되길래 몇 번을 시도하다가 포기했었다. 옆에 끼고 둘이 같이 회원 가입을 했다. 플라스틱으로 된 대출증 발급을 기다리는 동안 둘째를 먼저 올려 보냈다. 드디어 발급!!! 이게 뭐라고 십 년이 걸렸나 모르겠다..... 그동안은 내 회원증으로 다섯 권을 빌리고 반납하면서 근근이 연명했었다.
회원증을 들고 올라갔더니 둘째가 현대 문학 코너에서 서성이길래, 이런 이런 작가님들 책이 재미있고 유명하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나는 어쩐지 기행문이 계속 읽고 싶어 서성이다가 이금이 작가님의 페르마타를 집어 들었다. 이금이 작가님은 정말 기행문도 어쩌면 이렇게 마음에 와닿게 쓰시는지.... 정말 너. 무. 좋았다. 그리고 지나치는데 문득 들어온 제목 '아흔 즈음에'. '마흔'에 관련된 책들은 간혹 심심찮게 보이는데 '아흔'이라는 단어는 처음 본다.
아흔은 마흔보다도 훨씬 멀리 있고 그만큼 도달하는 사람도 적을 것이다. 서른 즈음에, 마흔 즈음에는 그래도 좀 상상이 가는데 아흔 즈음에는 상상도 가질 않는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 할아버지 모습일까. 굳이 나이 드신 어른의 모습을 그리려면 저렇게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부러 책을 꺼내 보진 않았다. 가끔은 제목이 주는 여운을 음미하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아흔이 되려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보다 조금 더 살아야 가능하다. 이미 내 몸은 이십 대 삼 심 대보다 쉽게 지치고 반응하는 속도나 받아들이는 인지능력도 더 떨어지는데, 아흔에는 어떨지 정말 모르겠다. 쉰, 예순, 일흔, 여든... 그리고 아흔. 우리 엄마는 마흔에도, 쉰에도, 예순에도 정정하셨고 일흔이 되신 지금도 정정하고 활동적이시다. 엄마를 상상해 보면 아무래도 외모는 반짝이는 젊음은 아니겠지만 특유의 밝은 쾌활함과 적극적인 성격으로 즐거운 장년의 느낌이다. 아마 여든이 되셔도 아흔이 되셔도 엄마의 그 밝음은 여전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흔도 괜찮을 것 같지만 여전히 나와 결부시키기는 참 어렵다.
오늘 페르마타를 읽다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신 부분에서 깜짝 놀란 것이 있다. 나는 예전에 늙고 추한 모습으로 연명하다가 죽느니 그냥 젊고 아름다울 때 삶을 마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요절이나 사십 대의 죽음은 아니었고, 그냥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힘없는 삶이 아니라 그냥 혼자서 말끔하게 삶을 마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삶에 대한 의지와 또 집착이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고 싶다고. 제대로 잘 살고 싶다고. 그게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니어링부부처럼 스스로 곡기를 줄여가면서 삶을 마감하는 것은 못할 것 같다.
엄마랑 음악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학교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너도 집회 같은 데 가고 그러니?" "그럼요. 정말 우리 교장 선생님 아니었으면 나도 어땠을지 몰라요." "그래도 죽긴 왜 죽어."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아.... 정말 모르시는구나.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짧은 순간 무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엄마들은 아이를 두고 죽을 수가 없다. 나의 고통보다도 내가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할 아이들을 생각하면 정말 그렇게 세상을 떠날 결심을 할 수가 없다. 나라고 그런 생각이 아예 안 들었던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를 보고 있는 어린아이 넷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은 정말 있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런 어린아이들을 두고 세상을 떠난 선생님들의 마음이 얼마나 몰렸을지, 얼마나 극한으로 치달았을지, 설 곳이 없는 자리까지 몰린 사람의 마음을 나는 감히 짐작도 못하겠다. 요새가 그런 시기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흔 즈음에'라는 단어가 그렇게 눈에 들어오고 그렇게 마음에 머물렀나 보다.
살아가면서 부끄러운 것이 더 많고 후회되는 것 역시 만만치 않고 아쉬운 것은 한가득이다. 슬픔과 분노와 좌절이 몰아치면 하루하루 날짜 지우는 그 저녁 시간조차 영겁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수없이 손가락으로 반복해서 세어보던 그 가을과 겨울날이 지금도 생각난다. 부디 아흔 즈음에 삶을 기쁘게 반추할 수 있는 분들이 많이 많이 계시면 좋겠다. 삶의 고통과 힘듦은 내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약이 너무 아파서 나의 이지를 잃을 정도는 아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