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소용돌이가 일 때는 조금 멈추자.
"아이가 중학교에 가면 일 년에 삼사천보다 훨씬 더 들어요." 얼마 전의 일이었다. 우리 집 셋째는 야구를 한다. 중학교에 진학하면 지금의 서너 배 이상으로 비용이 든다는 말이다.
한참 고만고만한 나이터울로 크는 네 아이 가정에서 운동을 하는 아이가 있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 부담스럽다. 성악을 직업으로 둔 신랑은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수입이 늘 불안정하다 못해 없는 경우도 허다했고 모아 둔 돈도 없었다. 시댁 역시 어렵긴 매한가지인지라 늘 도와드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결혼 후 아이를 낳으면 돌봐주시겠다던 시어머니는 몇 번 오시더니 힘에 부치신다고 하셨다. 첫 아이를 낳고 친정 엄마가 일주일에 두세 번씩 화성에서 개봉동까지 그 먼 거리를 대중교통으로 왕복 네댓 시간을 소요하시며 봐주셨고 결국 둘째를 낳고 나서 나는 육아휴직을 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휴직을 했지만 역시 신랑은 수입이 마땅치 않았다. (당시 육아휴직 수당은 월 50, 1년 후는 무급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아이를 재우고 나면 그 시간에 번역을 하면서 하루하루 버텨나갔다. 그 와중에 번역료를 떼어가는 사기도 당했지만 유령업체라 떼인 돈을 받을 길은 없었다. 당시에 몇 군데에서 동시에 진행을 했기 때문에 그중에서 제일 신뢰가 가고 정확했던 업체와 한동안 일을 계속했고, 수입이 많은 때는 거의 정상 월급과 비슷한 수준까지 받았다. 번역 시장이 얼마나 열악한지 그때 알았다. 월 이백 넘게 벌기 위해서는 정말 잠도 안 자고 컴퓨터 앞에만 매달려 있어야 한다. 그래도 유일하게 아이를 키우면서 프리랜서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이라서 그렇게 했다. 그때 시력도 많이 나빠졌다. 셋째가 태어나고 넷째가 태어나도 그렇게 몇 년간 번역을 했다.
드디어 복직하고 번역에서 해방되던 날 정말 나는 너무너무 기뻤다. 나는 번역을 좋아하고 영어를 좋아한다. 하지만 일로서 내 이름을 걸고 하는 번역은 그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다. 영한도 어렵고 한영도 어렵다. 수십 번 곱씹으면서 일대일로 매칭되지 않는 단어와 상황을 최대한 맞게 그려낸다. 그렇게 고민을 해도 하루 지나서 보면 또 고칠 것이 수두룩하다.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았던 번역일을 다시 고려하고 있는 것은 역시 돈 문제이다.
나는 대답했다. "그렇게 돈이 많이 들면 아이 야구를 더 시킬 수 없겠네요." 이 말을 하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이는 야구를 정말 좋아한다. 하루에 네 시간 이상씩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 같이 운동장에 서서 운동을 하면서 힘들다고 불평 한 마디 한 적 없다. 가끔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이긴 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를 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했다. 친한 친구들을 다 두고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까지 갈 정도로 신념이 확고했다. 그나마 야구를 시킬 수 있는 것은 전임코치제도 덕분이다. 해당 교육청마다 한두 학교씩 전임코치제를 적용하는 학교들이 있다. 교육청에서 감독들의 월급을 지원해 주는 덕분에 학부모의 자비 부담은 반으로 줄어들고 청렴제도의 적용도 받기 때문에 그 어떠한 선물이나 금전적인 감사의 표시도 할 수가 없다. 만약 일반 학교였다면 미안하지만 안 된다고 했을 것이다. 그래도 한 달에 평균 50 만원 정도 들어가는 금액은 사실 부담스럽다. 학부모의 차량 지원과 경기에 따라가는 수고도 만만치 않다. 셋째를 따라가면 다른 세 아이를 보살펴 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루 내지는 반나절 이상을 온전히 아이에게 내어야 한다. '월 50이면 해 볼만 하지 않을까?'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우리 집에는 다른 세 아이가 더 있다. 중학교에 다니는 두 딸과 초등학교 중학년인 막내까지. 아무리 줄이고 줄여도 최소한으로 들어가는 식비와 교육비는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정부는 왜 국민들이 아이를 안 낳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초기 비용만 지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국민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다자녀 가정에는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 비용만 지원해 줘도 정말 너무 좋겠다.)
거기에 전세자금 이자는 두 배 이상으로 올랐고, 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으로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데, 중학교에 가면 배 이상이 아닌 세 배 네 배 이상이라고? 한두 해도 아닌 고등학교까지 최소 6년을 지원해야 한다면 나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순간 너무 나쁜 생각이 들었다. 나쁘다기보다는 부끄러운 생각이라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이제 큰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간다. '만약 정말로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직장에 다닌다면.... 조금은 가계에 보탬이 되지 않을까? 그럼 훨씬 부담이 줄어들 텐데.'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나는 부끄러워 엉엉 울었다.
우리 엄마는 국졸이시다. 지금은 대학원까지 나오셨지만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국졸이셨다. 엄마는 늘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고 국졸인 것이 마음에 한이셨다. 공부가 더 하고 싶었지만 어려웠던 가정 형편 탓에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취직해야 했다. 그런데 엄마는 야간에는 공부를 시켜주는 공장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중학교 공부를 하고 싶으셨다고. 하지만 외할머니는 그 공장이 미덥지 못해서 엄마를 잡아끌고 그냥 일만 하는 공장으로 옮기셨다고 했다. 그렇게 6남매의 큰 딸이었던 우리 엄마와 바로 밑의 이모는 졸업하자마자 일을 했고 그 덕택에 셋째, 넷째 이모는 고등학교까지 잘 졸업해서 좋은 직장을 얻으셨다. 우리 엄마는 외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그래도 서러운 것은 서러운 것. 마흔 중반의 나이에 하나하나 공부를 다시 하시면서 그동안 맺힌 한을 어떻게 푸셨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큰 이모에게도 공부를 하자 권유했고 그렇게 두 분 다 대학원까지 잘 마치시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시고 살아가시고 계신다.
잠깐이지만 들었던 생각은 우리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했던 것과 같았다. 그래서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다. 이 생각을 했을 때 내가 밖에 있었고 큰 아이에게 말로 직접 꺼내지 않아 너무너무 다행이었다.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날개가 되어 주지는 못해도 최소한 힘이 되어 주는 기반이 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어찌 시작부터 가정의 무게로 끌어내리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또 생각한다. 어떻게든 내가 너를 밀어주는 엄마가 되겠다고. 끝까지 노력해 보겠다고. 절대 어린 네게 무거운 짐을 져 달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그래서 오늘도 또 열심히 생각하며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해 본다.
번역을 다시 시작해야 할까.... 마음이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