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와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기말고사를 정말 처참하게 죽을 쑨 것이 계기였다. 시험이 어려워서 잘 못 봤다면 이해가 된다. 나는 시험 점수가 낮게 나왔다고 화를 내지 않는다. 반대로 높게 나와도 엄청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아이들도 그 부분은 알고 있다. 다만 백점을 맞으면 엄마가 호들갑을 떨면서 좋아해 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선생님을 통해 듣고는 조금 놀랐다.
큰 아이가 시험을 망친 것은 '졸려서'이다. 잠이 워낙 많은 아이가 시험공부를 하겠다는 핑계로 2시는 기본이고 3시 넘어서 자는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혹은 음악을 들으면서 그 시간을 즐긴 것이다. 알고는 있었는데 일단 기다렸다. 본인이 겪어보고 느껴봐야지만 아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최악의 점수들을 받아왔다. 국어가 50점 정도 나왔다길래 물어봤다. "너무 졸려서 지문을 제대로 못 읽었어요." 수학도 50점 정도가 나와서 물어봤다. "졸려서 집중이 잘 안 되어서 그런 것 같아요." 평소에도 이렇게 못 봤으면 내가 정말 이해를 하겠다. 다 아는 문제까지 이렇게 와르르 틀려서 왔으니 그저 기가 막혔다. 시험기간은 사흘. 사흘 내내 지켜보며 기다리는 것도 인내심이 많이 필요했다.
아이를 데리고 카페로 갔다. 집 안에서 이야기하면 여러 가지로 방해받는 요인이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분위기를 바꿔서 좀 더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과 또 내가 너를 그냥 아이가 아닌 성숙한 인격체로 대접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신랑이 이렇게 말했단다. "엄마가 너한테 정말 화가 많이 났으니까 무엇을 말하든 다 듣고 그대로 하라."라고. 나는 말해 주었다. "엄마는 너한테 화를 내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물론 졸려서 시험 문제를 제대로 못 읽어서 이렇게 틀렸다는 것에는 당연히 화가 났지. 시험을 못 봐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졸려서 문제를 못 봤다는 부분이 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랬어. 하지만 나는 너를 위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지 너한테 화풀이를 하려는 사람은 아니야." 아이는 안심한 듯 보였다. 본인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절제가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
둘이서 방법을 모색했다. 아이는 사회와 과학을 좀 더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다만 학원이나 과외보다는 온라인 강의를 들으면서 모르는 것은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영어는 문법이 어렵다고 했다. 지문을 읽고 이해하고 회화를 하는 것은 괜찮은데 문법의 변형이 나오면 걸린다고 했다. 다만 지금 다니는 학원은 너무 익숙해져서 긴장감이 떨어지고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내 생각에도 이 학원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가기까지 3, 4개월. 온라인 강의를 들어보고 문제집을 풀어보고 다만 나와 스터디카페 앞의 무인카페에서 공부한 것을 점검받기로 했다. 집에서 하면 둘 다 흐트러지기 쉬우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확인하는 것이다. 자리는 지정석으로 해 달라고 했다. 내 생각에도 지정석이 나을 것 같다.
솔직히 이렇게 하기로 한 결정이 잘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한 적이 없다. 고1 때 딱 한 번 노량진에 있는 대형 학원에서 한 달 강의를 들어본 적은 있는데 정말 도움이 1도 되지 않았다. 강사들이 주르륵 설명하는 문제 풀이 과정이나 단어를 줄줄이 읽어주는 것들은 그저 한 번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그때 알았다.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혼자서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또 읽고 답지를 봐도 이해가 안 되는 문제들은 싸 들고 가서 수학과에 다니는 교회 오빠에게 2시간이고 3시간이고 물어보았다. 혼자 공부하면서 좀 외로웠던 것은 누군가 내가 세운 계획이 맞는지 확인해 주고 가끔씩 점검해 주는 사람의 존재였다. 잘하고 있는지, 좀 더 보충하거나 필요한 부분은 없는지 균형을 잡아주는 멘토 같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나 말고 아이의 공부를 확인하고 챙겨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당장은 모르겠다. 일단은 엄마가 해 달라고 하는데 나와 감정만 상하진 않을까 염려는 좀 된다. 2년 전보다는 나도 좀 더 성숙해졌으니 설명해 준 거 다음날 또 잊어버렸다고 화를 내진 않겠지.
그리고 나는 피아노 연습을 줄이기로 했다. 피아노가 너무 좋은데 그 바람에 밤늦게 연습을 하러 가면서 아이들에게 상대적으로 빈자리를 많이 보였더니 이런 부분에서 확실하게 공백의 여파가 크게 나왔다. 나도 배웠고 아이도 느낀 바가 많았다. 공부를 하고 싶긴 하냐고 물어보았다. 공부하고 싶진 않은데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이는 잘하고 싶은데 그게 좀 어렵다고 했다. 핸드폰이 문제였다. 패밀리 링크를 다시 까는 것에 아이는 동의를 했다. 아침에는 동영상을 보지 않기로 했고 하교 후에 잠깐 쉬면서 핸드폰 타임, 그리고 스터디 카페에서 1시간 반 정도 공부하고 집에 와서 저녁 먹기, 저녁 먹은 후 다시 가서 공부하고 반드시 12시 전에는 잠을 자기. 이 정도의 계획만 세웠다.
내가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기본생활습관이다. 성실하게 바른 자세로 임하는 것. 둘째는 그런 부분을 잘 지키는 편이다. 다만 상냥함의 장착이 좀 더 필요하고 큰 아이는 상냥하고 친절하지만 미루는 습관이 있다.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속이 끓었어도 아무 말하지 않고 기다려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아이에게 바른 소리를 읊는다고 아이의 마음에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내 속은 당장은 시원했겠지만 더 큰 답답함이 밀려왔겠지. 나는 아이의 성장을 도와주고 함께 가는 사람이지 내 마음대로 만들어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 정말로 십 대 딸들 키우기 참 쉽지 않다. 아들들의 사춘기는 어떨지... 벌써부터 마음이 살짝 무거워지지만 뭐. 또 그때가 되면 그때 생각해서 풀어갈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