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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Dec 20. 2023

초등교사에게 영어란

나는 영어공부를 늦게 시작했다. 70년대의 끝자락인 79년에 태어난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알파벳을 배우고 아이엠어보이로 시작했다. 학원은 아예 다니지도 않았고 따로 사교육을 받지도 않았기에 중학교 공부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아무런 감도 없었다. 어느 날 친구들이 칠판에 영어 단어를 써 가면서 외우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영어 단어를 외워야 하는 거였어? 그럭저럭 학교 공부는 평균 80점 후반과 90점 초반을 오가면서 했지만 내가 뭔가를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자신은 없었다.


그렇게 2년을 뜬구름 잡듯 지내다가 2학년 여름, 아는 분께 사흘간 영어 발음 지도를 받았다. p, t, k와 같은 무성음, b, f, z와 같은 무성음, 그리고 모음을 내는 방법을 배우고 그다음부터는 입 근육이 경련이 나도록 혼자서 연습을 했다. 눈높이에 처음으로 영어 프로그램이 도입되던 시기라서 Tom runs. I run. 과 같은 기본 문장을 수백 번 연습하면서 기초부터 닦아나갔다. 한 주에 30장씩, 40장씩 공부를 해서 나를 봐주시던 눈높이 영어 선생님은 본사에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고 들었다. 이렇게 많이 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선생님은 눈치껏 장수를 늘려주시면서 나를 공부시켜 주셨다. 또 비슷한 시간에 한국에 잠깐 와서 살다가 미국으로 돌아간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 아이와 펜팔을 하기 시작하면서 영어로 조금씩 소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 미국에 입양되었던 교포 청년이 한국에 부모를 찾으러 왔다가 우리 교회에 오기도 했고 외국 목사님이 오시기도 했다. 놀랍게도 나는 그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간단한 통역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2년간 기초부터 닦았던 내게 더 이상 영어는 막연한 과목이 아니라 제일 좋아하는 과목으로 바뀌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수능 시험 순서로 외국어영역이 제일 마지막에 있었는데, 나는 제일 좋아하는 영어를 기다리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앞의 언어, 수탐, 사탐과탐 영역들을 모두 기쁘게 치를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영어가 재미있었다. 혼자서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나는 내가 외국어 공부 자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리저리 다양한 외국어를 시도해 본 후 시간은 제한이 되어 있고 결국 한 가지에 굳이 올인을 해야 한다면 영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령을 받은 후 나에게 주어진 자리는 당연하게도 영어교과전담교사였다.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에 영어가 도입된 초기였고 나는 영어교육과가 배출한 4번째 졸업생이었다. 그만큼 영어교육과는 역사도 짧았고 당연하게도 졸업생도 많지 않았다.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나에게 영어교과전담교사를 계속해서 주지 않았다. 초등학교에서 전담교사는 보통 임신 예정, 출산 예정이시거나 건강이 안 좋거나 일이 너무 많아 바쁘신 부장 선생님 등에게 주어진다. 그리고도 여유가 있으면 전담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올해 당연하게도 영어를 2년 연속으로 가르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교담을 희망하시는 분이 너무 많았고, 그래서 학년 점수에서 밀려서 6학년 담임이 되었다. 작년에 영어문집을 내 보면서 올해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 보고 싶은 것이 더 많았는데 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그럼에도 6학년 담임이 되어서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담임으로 한 해를 도전과 극복으로 채웠으니 괜찮다.


담임이 되었으나 나는 아이들과 영어를 계속했다. 창체 시간에 짬짬이 영어로 글을 쓰고 포스터를 만들고 여러 계획을 세워보는 활동들을 했다.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국제공동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다른 나라의 아이들을 만나게 해주는 시간이었으나 선발되지 않았다. 지원자가 별로 없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영어는 내가 배울 때보다 4년 먼저 초등학교에 들어왔고 30년 전과 다르게 아이들은 영어에 훨씬 노출이 많이 되어 익숙한 듯 여겨지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정말 유창한 듯 보이는 아이조차 작문을 시켜보면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니 반대로 영어가 너무 싫고 부담스럽고 힘든 아이들도 상당히 많다. 그리고 정말 어떤 아이들은 영포자의 마음으로 지내다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진짜 영포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나는 아이들에게 영어란 즐거운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한국에서 아이들이 영어가 싫고 재미없는 과목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에서 영어는 목적교과이기 때문이다. 영어 자체를 익히는 것이 목적이고 시험을 잘 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는 도구교과이다. 영어는 도구로서 사용될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 영화를 너무 좋아하는데 자막 읽기가 싫어서 영어를 공부하고 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팝송을 잘 부르고 싶어서 공부하다 보니 영어전문가가 된 이야기 등등을 누구나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나의 경우, 영어는 다리, 그러니까 bridge(브리지)였다. 더 넓은 세계, 새로운 세계, 내가 몰랐던 세계로 나를 이끌어 주는 매개체였다. 내가 아는 짧은 지식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하고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 하고, 또한 그들이 나로 인해서 몰랐던 것을 알아가면서 기뻐하고 고마워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짧은 지식으로도 가능한데 이것을 깊고 넓게 쌓아간다면 얼마나 더 풍부한 것들이 펼쳐질까. 한국에는 이미 번역된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또 반대로 번역이 안 된 수많은 책들 역시 존재한다. 해리 포터의 경우, 번역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원서를 사들고 미친 듯이 읽어 내려가기도 했었다. 또 원서로 읽어야만 비로소 이해가 되거나 그 의미를 훨씬 풍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도 생각보다 많이 있다. 영어를 배우면 배울 수록, 그리고 실력이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내가 볼 수 있는 세계가 훨씬 깊고 넓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초등학교에서는 영어를 엄청 잘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서 한 발 더 연결되는 다른 것들을 즐기는 기쁨이다. 그 즐거움을, 재미있음을 알게 되면 단어를 공부해야 하고 문법을 들여다봐야 하는 수고로움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영어로 소통하는 즐거움, 영어로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자신감, 그리고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 때 오는 짜릿함과 같은 이런 기쁨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영어 수업, 보람 있는 영어 수업, 유의미한 영어 수업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고 노력했다. 그러니 초등교사인 내게 영어란, 단순한 하나의 교과목이 아니다. 그렇게 대충 가르쳐 주고 말 수가 없다. 이제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시험을 위한 영어를 지겹게 공부해야 할 아이들에게, 영어의 궁극적인 목적을 생각하도록 알려주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시작점인 것이다.




앞부분의 이야기를 길게 쓴 것은 오늘 국제공동수업 보고회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초중고등학교의 수많은 선생님들이 어떻게 아이들의 성정을 위해서 다른 나라의 선생님들과 협력하여 수업을 하며 1년을 보내셨는가를 보면서 또다시 설렘과 기대로 차는 나를 보았다. 어느 선생님의 말씀처럼 학생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 교사의 가장 커다란 기쁨이자 보람이니까.


올 한 해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는 일들은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나는 어떻게든 성장했다. 같이 성장했다. 교학상장. 서로 가르치며 배우고 그렇게 성장했다. 이제 서로를 좀 알게 되고 나니 이별할 시간이다. 그럼에도 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기대에 차는 것은 올해의 배움을 바탕으로 새롭게 시작할 내년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중요한 교과목들과 함께 또 다른 강력한 힘이 되어줄 꼭 필요한 과목인 그 영어와 함께 말이다. 가끔 방향성이 헷갈리는 영어의 목적을 잘 잡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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