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딸아이의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전화는 날마다 불이 났다. 이리저리 사건들도 좀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서 나는 딸아이의 랜선 친구들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 누구랑 저렇게 재미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가끔은 영어로도 일본어로도 대화를 했다. 슬쩍 들어보면 그냥 소소한 잡담이었다. 서로 닉네임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다고 하던데 솔직히 몇 달이나 가랴 싶었다. 몇 명과는 나와 인사도 텄다. "ㄹㅎ 어머님 안녕하세요~" 우리 딸의 이름은 ㅅㅇ이지만 닉네임은 다른 것을 쓰기 때문에 ㄹㅎ 어머니라고 불렸다. 예의가 바른 아이들인 것을 일단 확인했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우리 딸이 이 온라인 친구를 만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야 하는 곳이 무려 조치원이란다. 하루 날 잡아서 중간쯤 되는 곳에서 만나려고 하니 보내달라는 것이다. 나는 안 된다고 했다. 너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너 혼자 생판 가 보지도 못한 곳에 혼자 보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아이는 울면서 30분마다 보고를 하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나는 안 된다고 했다. 미성년자인 딸을 그냥 지방에 보내는 엄마가 어디 있느냐고 이야기했다. 상심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아이에게 정말로 원한다면 내가 같이 가겠노라고 했다. 다만 나도 일이 있다. 지지난주는 좋어연 총회도 있었고 글로성장연구소 작가님들과 점심 약속도 있었다. 그다음 주에는 넷째와 어딘가를 다녀와야 했다. 그래서 아이는 꼬박 3주를 기다려서 그 랜선 친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원래는 KTX를 탈까도 생각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을 생각하니 그냥 내가 그 아이 동네로 가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그곳은 조치원이 아닌 세종시. 난생처음 세종시를 딸아이 랜선 친구를 보러 가게 될 줄이야. 날 좋은 토요일이니 2시간은 훌쩍 넘는다. 어제도 집안 일 하다가 늦게 잤는데 아침 일찍 야구 시합을 가는 셋째를 데려다주느라 별로 잠도 못 잤다. 걱정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는 길에 정신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하는데 아직 반도 못 왔다. 졸음쉼터에서 쉴까, 휴게소에 들어갈까 고민을 하는 사이 이미 다 지났다. 졸지 않기 위해 몇 개 안 남은 초콜릿을 아껴서 입에 넣고 물을 마시면서 겨우겨우 세종시에 도착했다.
눈이 서글서글 예쁘고 밝은 미소를 지닌 귀여운 아이였다. 둘은 처음 보는데 서로 좋아서 방방 뛰었다. 나는 늦게 아침을 먹었기 때문에 배가 안 고팠고 둘은 ㅅㅈ떡볶이로 갔다. 아니.... 세종시까지 왔는데 ㅅㅈ 떡볶이라니... 나는 특색 있는 지역의 소소한 떡볶이 집이 낫지 않냐 물었지만 친구 아이도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둘이서 뭐가 그리 좋은지 떡볶이 집에서 한 시간 넘게 수다를 떨면서 실컷 먹고 나서는 카페에 가서 음료를 테이크 아웃했다. 그리고 노래방을 가고 싶단다. 4시에는 출발해야 덜 막힐 것 같은데 아이는 4시 반까지 한 시간은 놀게 해 달라고 했다. 오케이. 나는 근처 다른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잠깐 샌드위치를 먹으며 앉아 있었더니 한 시간이 금방 가 버렸다.
오늘 일정이 조금 일찍 끝나서 부모님을 도와드리러 가겠다는 친구 아이를 중간에 데려다주고 우리는 다시 서울로 향했다. 가는 길은 조금 더 막혔지만 커피 파워로 올 때보다는 생생하게 잘 갈 수 있었다. 다만 중간중간 위험한 순간들이 있었다. 갑자기 앞에서 휘어진 차 번호판이 날아와 우리 차 바닥을 긁고 갔다거나 (타이어에 안 스쳐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잘 달리던 앞 차가 급정거하면서 옆 라인으로 끼어들려고 아예 멈춰 선다거나 하는 이런 소소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아슬아슬한 순간들은 잘 지나갔다. 평택 - 친구네- 를 지나고, 안산 - 친정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곳-을 지나면서 내가 바쁘다고 친구네도 안 오고 친정 부모님도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인데 딸을 위해 왕복 6시간 가까이 운전하면서 하루를 온전히 쏟다니. 나는 정말 훌륭한 엄마가 아닌가 스스로 자화자찬(속으로) 하면서 겉으로는 약간만 생색을 내었다.
아이는 매우 만족해 했다. 아주 재미있었노라고. 딸 아이에게 큰 기쁨을 선사하고자 하루를 통으로 비우고 편안히 모셔다 드리고 엄카까지 제공했으니 이렇게 집에 오면 그래도 큰 딸이 뭔가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하겠지라는 기대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시 기대는 깨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이는 맛있게 구워준 연어스테이크를 잘 먹고 누워서 잘 뒹굴뒹굴하다가 마지못해 옷정리를 조금 하고 다시 뒹굴거렸다. 운전을 이렇게 오래 멀리 했더니 팔도 저린데 어깨도 아프고 다리는 쑤시고 눈은 한없이 졸린데 집안일을 외면할 수 없어서 하나씩 또 클리어했더니 12시가 넘어버렸다. 음. 이렇게 가시적인 성과는 없지만 딸이랑 멀리멀리 지방나들이 하면서 심적인 안정을 지지해 주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자......... 다음엔 그냥 KTX 타고 가자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