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대놓고 '한국이 싫어서'라니. 와, 작가님 용기가 있으신 것 같아!! 실제로 겪으신 일인가 했더니 온라인 조사를 많이 하시고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이라 이렇게 접근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요새 이금이 작가님 소설을 보면 일제강점기, 조선 말 한국 근현대사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해외로 나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시는 것 같다. 제한된 한국의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 그렇다면 현대는 어떤가.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비슷하게 접근한다고 생각된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그녀가 불평하는 이유는 사실 다 비슷비슷하다. 만원 지하철에 꽉 끼어서 출퇴근하고 불합리한 직장 구조에 정말 찌들게 가난한 집안 환경, 한심해 보이는 자매들과 자신에게 기대는 것 같은 부모님. 그 와중에 문화 시설은 누리고 싶은데 형편은 여의치 않은. 홍대를 졸업한 엘리트여도 취직은 어렵고 삶은 힘들다. 친구들을 만나도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이 된다. 그래서 그녀는 호주로 가기로 정한다. 절절한 남자친구를 두고서.
그리고 시민권을 따는 데 성공한다. 잠깐씩 한국에 들어와서 친구들과 가족들을 만난다. '정말 하품을 참으며 걔들 얘기를 들어줬지. 자세히 들어보면 다 흥미로워. 애들 말발도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고. 그런데 이상하게 재미가 없더라.'
'사실 지루한 얘기는 두 가지뿐이었어. 은혜 시어머니 이야기, 그리고 미연이 회사 이야기. 그런데 은혜랑 미연이 그 두 얘기를 너무 오래 하는 거야. 몇 년 전에 떠들었던 거랑 내용도 다를 게 없어. 걔들은 아마 앞으로 몇 년 뒤에도 여전히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을 거야.... 걔들이 원하는 건.... 공감해 주는 거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냐. 근본적인 해결책은 힘들고 실행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니까.....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무서운 거야. 걔들한테는 지금의 생활이 주는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이 너무나 소중해.'
'나는 행복도 돈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 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이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내가 난관을 뚫고 기자가 되었다.'는 기억에서 매일 행복감이 조금씩 흘러나와. 그래서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남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 거야.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정말 순간순간을 살았지.'
'나한테는 자산성 행복도 중요하고 현금흐름성 행복도 중요해.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나한테 필요한 만큼 현금흐름성 행복을 창출하기 어려웠어.... 아무리 미워하고 욕해 봤자 자산성 행복도 현금흐름성 행복도 높아지지 않아.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지 않나. 자기 행복을 아끼다 못해 어디 깊은 곳에 꽁꽁 싸 놓지. 그리고 자기 행복이 아닌 남의 불행을 원동력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는 거야....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라도 남을 불행하게 만들려고 해.'
'추위를 싫어한 펭귄' 파블로의 이야기도 비슷하게 시사한다. 너무 추워서 지금 사는 곳에서 살 수 없어서 정말 다양한 시도 끝에 춥지 않은 곳에서 따뜻하게 살 수 있게 된 펭귄의 이야기. 어쩌면 주인공인 계나와 내가 달랐던 것은 적어도 안정적인 직장과 넉넉한 환경은 아니었으되 나에게 금전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았던 친정부모님의 덕이었을까. 동생과 나는 방도 따로 썼으니까. 주인공처럼 세 자매가 한 방에서 생활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라고 치부하기엔 그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과 고통을 느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미치도록 힘들어도 견뎌야 하는 이유가 있고 기한이 명확할 때는 인내하면서 끝나기를 기다릴 수 있는 것이고 그게 아니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굳이 여기서 이럴 필요가 없다고 여겨질 때는 모험을 감내하고 위험을 무릅쓰며 방향성의 전환을 시도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또 내 눈에 이렇게 보인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도 없는 것이다. 지금의 생활이 주는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이 확실한 것을 어찌 가볍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냥 나는 그 안정감과 확실한 예측 가능성보다 다른 것이 더 소중했고 필요했던 것뿐이다. 나는 늘 젊은 시절 외국에서 생활해 보지 못한 것, 여행을 많이 다녀보지 못한 것이 늘 아쉽다.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착한 장녀였던 나는 주일날 교회를 빠지면 안 되는 것과 집을 부모 허락 없이 떠나는 것을 어길 수가 없었고 그래서 공식적인 사유 몇몇을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가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아마 그 시절의 나는 답답해하면서도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더 큰 가치였었고 그것을 깨뜨리는 것은 나의 마음에 불안감을 가져오고 그로 인해서 안정되지 못한 심리는 더 힘들 것을 알았기에 그랬을 것이다. 알아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시점에는 설익어서 안 되는 것도 있다. 모든 것은 결국 그 시기가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해 본다. 그 시기가 오기까지 겪는 과정이 괴롭고 어려운 것이라고 해서 꼭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