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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May 20. 2024

관계 맺기가 서툴었던 아이가 초등교사가 되면

슬로우 리딩으로 진행하는 영어원서한권읽기의 새 책은 안녕, 우주 (Hello, Universe)이다. 뉴베리 수상작이기도 하고 예전부터 꼭 읽어 보고 싶어서 일부러 한글 번역판도 읽지 않았다. 작년 우리 반 야무진 ㅅㅇ이가 길게 독서 감상문을 쓰며 꼭 읽으면 좋겠다고 했던 추천작이기도 하다.


오늘은 처음 두 장만 읽었는데 외로운 두 아이의 심리 상태가 묘사가 된다. 


in gym class; where he was the smallest, most forgettable, and always picked last.

Grand Failure.

I don't need a gazillion friends.


체육 수업 때 팀을 짜곤 한다. 가끔은 운동을 제일 잘하는 두 명의 아이가 차례로 팀원을 한 명씩 고르기도 한다. 그때마다 제일 마지막에 뽑히는 아이. 가장 잊히기 쉬운 아이. 완전한 실패작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를 아직 명확하게 밝히진 않았다. 유일한 친구는 자기 방에 있는 기니피그이고, 심지어 가족들 사이에서도 묻혀 있다. 이 아이를 봐주는 것은 할머니뿐.


또 다른 한 아이는 청각 장애를 지니고 있다. 이 아이는 난 엄청난 수의 친구가 필요하지 않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I don't even need one. All I need is me, right? Solo - it's the best way to go. It's a lot less trouble. 

나만 있으면 되고 혼자가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훨씬 덜 귀찮으니까. 


방법은 다르지만 두 아이 모두 외로움을 호소한다. 친구가 필요하다고. 필요 없다는 말은 정말로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너무 필요하니까 오히려 방어 기제로 반대로 말하는 것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다. 새 학기가 되면 아이들이 모두 걱정하는 것은 '내가 친구를 잘 사귈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친구가, 나랑 친한 친구가 얼마나 우리 반에 있을까' 등등의 마음이다. 마음이 여리고 예민한 둘째는 늘 이 걱정을 했다. 전학을 두 번이나 하면서 기껏 사귄 친구들과 다 떨어져서 적응하느라 너무 힘든 세월을 보냈고 6학년이 되어서야 겨우겨우 친구를 사귀었다. 친한 친구들과 같은 반이 되지 않아서 중학교 생활 2년째 고군분투 중이다. 반에서 새로 친구를 사귀자니 이미 무리가 형성이 되어 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이들은 뭔가 잘 맞지 않아서 이래저래 애매한 처지라고 했다.


생각해 보면 나도 참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전학을 무려 세 번을 다녀서 네 개의 초등학교를 다녔다. 친해진 친구들과 다 멀어지고 고학년이 되어 전학을 와서는 여러 일들로 오히려 마음을 닫았다. 아이들과 어설프게 우정 아닌 우정인 척 어울리다가 마음만 다치는 것보다는 그냥 혼자서 책을 읽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 중요한 초등학교 고학년 시기에 나는 그렇게 '나' 중심으로 보냈고 적당히 숙이거나 맞추는 태도를 가지지 못한 채, 아니면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서 중학생 시기를 맞았고 그렇게 보냈다. 둘째와 비슷했던 것 같다. 친구만큼은 어떻게 내 의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중학생 시절에 배웠다. 그렇다고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고 애매하게 그룹에 속해 있기도 했다. (하필 서로 싫어하는 애와 같은 그룹이었는데 또 그 친구와 집이 제일 가까워서 서로 어쩔 수 없이 우중충한 기분으로 같이 집에 가기도 했다. 동선이 같은 것을 어쩌란 말인가....) 또 커다란 박스를 한가득 채울 만큼 서로의 작문 실력과 독서를 나누는 문학 친구가 생겨서 그 아이와 매일매일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렇게 이리저리 깎이면서 중학생 시절을 보냈다. 아, 이런 말을 하면 아이들이 싫어하는구나. 아, 이런 말을 하면 눈치가 없는 것이 되는구나. 아, 이렇게 해야 그래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는구나. 융통성이 그렇게도 없던 나는 직접 몸으로 체감하면서 은따가 되기도 했고 겉돌기도 하면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이미지 자체는 좀 구리구리한데 또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면 말이 통하는 친구들도 있어서 짝꿍과는 비교적 잘 지냈다. 다만 앞서 썼듯이 이미 다 자기 그룹이 형성되어 있으니 나와는 잘 지내도 정작 밥을 먹는 친구는 따로 있는 것이다. 안 좋아하는 아이와 어쩔 수 없이 밥을 같이 먹어야 하는 그 쓰라린 마음이 지금도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그래서 딸에게 물었더니 자기 자리에서 먹게 되어 있어서 그런 건 별로 문제가 안 된다고 했다. 다행이다. 


이런 나를 지켜보시던 담임 선생님들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애 자체는 나쁜 것 같지 않고 공부도 곧잘 하고 시키는 대로 이것저것 잘하는데 유독 아이들과 잘 못 어울린다. 저쪽에서 책만 읽고 있는데 문제는 진짜로 책이 좋아서 책만 읽는 것도 상당히 - 사실은 진짜로 - 많았던 것이다. 친구 집에 놀러 가도 그 애랑 노는 대신 그 집에 있는 책들을 읽고 있었으니 친구가 싫어할 법하다. 어린 시절의 나야.... 도대체 왜 그랬니.....


초등학교 때까지는 그래도 딱히 상관이 없었던 것 같은데 중학교 가서 '어울림'의 필요성을 좀 절감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가서 인싸가 될 줄이야..... 친구가 손에 꼽을 정도로만 있다가 갑자기 너무 많아지니까 그건 그거대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가 많은 것과 적은 것 사이를 오가느라 어른이 되어서도 정신이 없었고 내가 지속할 진실된 관계들과 인연들을 찾아가고 마음을 나누는 법을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때까지 정말 수십 년의 시행착오를 거쳤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이 싫어할 만했던 나의 그 시절 에피소드들을 하나씩 한 번 풀어볼까 싶기도 하다. 한 가지 좋은 점은 그렇게 아싸에서 나름 인싸생활도 겪어 보고 하는 과정에서 이리저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가는지를 조금씩 배워갔다는 점이고 그 외로웠던 아이의 시선에서 반 아이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친구가 별로 없는 아이들은 친구가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서, 그리고 내가 친구들과 서로 편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친구를 만들어 줄 수는 없다. 다만 활동을 할 때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조금 더 신경을 써 주고 기다려 줄 수 있다. 한 마디 말을 더 걸어 줄 수 있고 한 마디 말을 더 하게 할 수도 있다. 무심한 듯 자연스럽게 그런 아이들의 자리를 슬쩍 마련해 준다. 어차피 성장통은 누구나 겪게 되어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좌절할 만큼의 고통이 아니라 딛고 일어설 수 있을 정도의 아픔이면 할 만하다. 그리고 곁에서 누군가 지지해 주고 함께 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잘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곁에서 절대적인 그 누군가는 아니더라도 그 순간에 의지가 되고 힘이 되는 사람이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스승의 날을 앞두고 작년 아이들이 차례로 찾아와서 편지와 선물을 주고 갔다. ㅈㅎ이는 늘 조용한 편이었는데 어느 순간 굉장히 수다쟁이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공부를 아주 잘하지는 않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착하게 노력하는 아이였다. ㅈㅎ이가 그렇게 편지를 길게 써 줄 줄은 몰랐는데 거기에 의외의 내용이 있었다. 우울증이 있었는데 지수가 많이 낮아졌다고. 그래서 한 해 동안 남아서 모르는 부분도 가르쳐 주시고 사랑해 주신 선생님께 너무 감사하다고. 일기도 겨우겨우 써서 내던 ㅈㅎ이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담아 한 장 가득 꾹꾹 눌러쓴 그 편지를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아이들이 이렇게 힘을 얻었다는 사실에 올해도 조금 더 아이들을 살펴주어야겠다고 또 한 번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교 시절 외로웠고 친구를 잘 못 사귀었던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 그리고 그 시절의 좋은 친구들은 여전히 지금도 좋은 친구로 남아 있다. 친구가 많지 않았어도 계속해서 가는 관계가 있으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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