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울 May 22. 2024

20년 만의 비움

정확하게는 22년. 발령을 받자마자 영어과목 전담 교사로 4개 학년을 가르쳤다. 그때만 해도 시간표를 같은 학년을 하루에 넣어주는 것이 편하고 효율적이라는 것을 몰라서 하루에 두세 개 학년이 고루 섞인 날들이었다. 한 학기만 영어를 가르치고 두 번째 학기부터는 새로 생긴 학급의 담임교사가 되었고 그다음 해에도 담임을 맡아 영어를 그만 가르칠 줄 알았다. 그 학교에서 담임으로서, 교과로서 영어를 마지막해까지 가르친다는 것은 전혀 계획에 있지 않았다.


병아리 교사 2년 차. 교감 선생님은 나를 부르시더니 '수업개선연구교사'를 하라고 하셨다. '그건 승진을 하고 싶거나 정말로 경력 교사들이 연구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닌가?' 이제 2년 차에 접어든 나는 수업개선연구교사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처음 들어 보았다. 

"저는 못 할 것 같아요." 

"그럼 5학년 전체가 같이 주제를 정해서 팀으로 연구 교사를 해야 합니다."

네에????

아니 이게 무슨 협박이란 말인가. 너 혼자 다 하던지 아니면 5학년이 같이 팀으로 해라. 그 말은 내가 싫다고 하지 않으면 이 귀찮은 일을 5학년 선생님들과 다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라 그냥 혼자서 수업개선연구교사를 하기로 했다. 주제는 영어. 그러니 이제 나는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 그때 유일하게 교과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영어와 다른 한 과목이었는데 영어를 빼 버리니 영어 선생님은 다른 과목을 가르쳐 주셔야 했다. 당시 영어교과교사는 1년 어린 후배였다. 우리는 고민 끝에 내가 우리 반과 옆반 영어를 합쳐 4시간을 가르치고 후배는 우리 반 사회 3시간과 도덕 1시간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그 작은 학교에서 무려 과목을 두 개를 추가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너무 고마운 일이다. 


그때부터 3년간 수업개선연구교사를 했다. 매년 입상을 했다. 당시 1등급을 받으면 해외연수를 1달간 받을 수 있었는데 나는 2등급과 3등급만 받았다. 1등급은 신규가 받을 수 없고 이렇게 입상만 한 것도 잘한 거라고 나중에 들었다. 절반은 입상도 못한다고. 1년에 4번의 수업 공개를 해야 했다. 다른 학교 선생님들을 초청하고 장학사님도 모시는 정말 학교의 큰 행사였다. 끝나고 다른 선배 선생님의 연수까지 이어서 준비하는 꽉 차게 하는 일정에 각종 연수 참석과 다른 선생님들의 수업 참관은 필수고, 나중에는 보고서 제출과 교육청 홈페이지에 가능한 많은 자료를 탑재해야 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각종 피피티와 디지털 자료가 많지 않았고 대체로 아날로그를 선호했다. 빈병에 콩을 넣고 마라카스를 만들어 영어 시간 챈트에 맞추어 흔들거나 커다란 그림을 가져와 일부만 보여주며 추측하도록 하는 식의 실물 자료가 주를 이루었다. 수업 공개하는 날은 각종 자료를 복도나 옆반 교실에 전시해 놓아야 했다. '나 이만큼 그동안 열심히 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던 것이다. 마지막 해에 발령받은 동기에게 수업개선연구교사 타이틀을 물려주기까지 3년간 정말 쉴 새 없이 저런 자료들을 만들었다. 칠판에 붙여놓고 아이들과 직접 만지거나 보여주면서 수업을 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을까 싶어 코팅한 후 비닐포켓을 만들어 거기에 출력한 자료만 바꿔 끼우는 방식 등을 고민해서 계속 쓸 수 있게 만들었다. 


첫 학교 5년을 마치고 다음 학교로 옮길 때 나는 1톤 트럭에 박스만 24개를 실었다. 그 많은 자료들을 육아휴직을 하면서 조금씩 정리를 했고 그래도 마지막까지 상자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 만들 때 정말 너무 고생을 하고 정성을 다해서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언젠가 다시 쓸지도 모른다는 그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내게는 당연하게 있었다. 하지만 복직했을 때도, 그리고 지금 학교로 옮겨와서 영어를 가르칠 때도 나는 결국 그 박스의 자료들을 쓰지 않았다. 교실 한편에 잘 모셔놓고 지금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자료들을 만들어서 잘 썼다. 


지난주에 우리 반 영어 선생님이 교실에 놀러 오셨다. 둘이서 한참 이야기하다 우연히 옆에 놓여있던 영어 자료 상자 이야기가 나왔다. 보여 드리니 "선생님! 이거 이제 교육과정이랑 안 맞아요!" Listen & Speak 카드를 보시더니 "지금은 이 부분도 없어요!" "그래도 열심히 만들었는데 안 쓸까요?" "저도 그 맘 알죠. 그런데 진짜 교과서 달라져서 이제 못 써요. 버리세요!" 그 말을 듣고도 미련이 남아 칠판에 붙여 보는데 주르륵 미끄러져 떨어져 버린다.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석도 힘이 다해서 칠판에 붙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버리겠다고 다짐을 하고도 바쁘다는 시간 탓을 하고 며칠을 더 쳐다보다가 결국 오늘 그 상자를 비워내었다. 아직도 반짝반짝한 그 코팅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환경 쓰레기를 양산한 것인가 싶어서 마음이 찔리기도 하고, 젊은 시절 온 힘을 바쳐서 영어교육에 매진했던 그 흔적들이 이렇게 가는구나 싶어 어쩐지 아프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차피 버렸어야 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약간의 미련을 담아서 하나하나 천천히 추억을 되새기며 쓰레기통에 담았다. 상자가 있던 책장 한 켠에는 밖으로 삐져나와 있던 미술자료집을 잘 정리해서 꽂아 주었더니 한결 정돈된 교실 공간이 나왔다. 물론 상자 하나 버렸다고 뭐가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오랫동안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것이 치워지면서 마음의 공간도 같이 조금 넓어진 것 같았다. 조금 더 정리된 교실 문을 닫으면서 다음은 어디를 정리할까 또 생각했다. 한눈에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공간을 조금씩 늘려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날이 더워서 우는 거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