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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Jun 11. 2024

모르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영어원서 슬로우리딩으로 '영어책 읽는 밤'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에 읽고 있는 책은 '기억전달자'로 잘 알려진 로이스 로리의 '별을 헤아리며 (Number the Stars)'이다. 별을 헤아린다는 어쩐지 낭만적일 것만 같은 제목의 이 책은 사실은 굉장히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다. 나치가 유럽을 점령하던 그 시절, 덴마크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분들은 유태인 학살은 수없이 많이, 그리고 무겁게 조명이 되고 있고 반면에 다른 일들은 축소되고 있다고 유태인 파워로 인한 무게의 정도가 다르다고 이제는 유태인 학살은 좀 지겹다고 하시기도 한다. 이해는 한다. 세계 2차 대전 중 비단 독일뿐 아니라 세계 다른 곳곳에서 일어났던 그 수많은 학살과 학대는 상대적으로 덜 조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유태인들은 이미 충분히 보상을 받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슬픔과 고통의 무게를 경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로이스 로리의 별을 헤아리며는 뉴베리 수상작이기도 한데 두께가 얇고 단어가 크게 어렵지 않아서 영어책 입문자들에게 많이 추천되는 도서이다. 물론 입문용이라고 해도 여기저기 걸림돌이 되는 단어도 많고 찾아보고 생각해 보아야 할 단어들도 많다. 이번에 영어책 읽는 밤을 통해서 두 번째 읽게 되었는데 줄거리는 알고 있었지만 조금 더 깊게 보다 보니 눈에 보이는 부분들이 많다. 다음에 또 다른 모임에서 세 번째 읽을 예정인데 그때 보이는 것이 또 다를 것이다. 


이번에 와닿은 문장 하나가 있다. 

"It is much easier to be brave if you do not know everything.... We know only what we need to know."

모든 것을 알지 못할 때 용감해지기 훨씬 쉽단다. 우리는 오직 알아야 할 것만 알고 있는 거지.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아는 게 힘이지 않던가? 그래서 그렇게 공부를 하는 것인데 왜 모든 것을 알지 못할 때 용감해지기 쉽다는 것인지 처음에는 애매했다. 위험한 시대에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너무 잘 알면 오히려 두려움에 사로잡혀 해야 할 일을 다하기 어려울 것이고. 별을 헤아리며를 읽으면서 동시에 '안녕, 우주 (Hello, Universe)'를 영원한읽기 모임에서 읽고 있다. 안녕, 우주에서는 이런 부분이 있다. 필리핀의 민담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야기 속 한 소녀는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한다. 가족 모두는 태어날 때 각자의 운명을 알게 되는데, 아무리 해도 이 소녀만큼은 운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묻던 소녀는 결국 운명을 스스로 찾아서 길을 떠나고 운명을 만들어낸다. 


The girl who didn't know her destiny. Fulfilling my destiny.

운명을 알지 못했던 소녀야. 내 운명을 실현시키는 중이지.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 과거를 알고 현재를 안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사실은 그 조차 단편적인 것을 아는 것에 불과하고 그 단편적인 조각들을 주관적으로 해석해서 엮어내었을 뿐이다. 하지만 다 알지 못하기에 오히려 살아갈 수 있다. 


둘째가 어제 엉엉 울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못 찾으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아이의 질문에 선 듯 현답을 해 줄 수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하루하루 매시간을 치열하게 책임감 있게 살아가는 둘째는 불안한 마음이 크다고 했다. 불안해서 더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아이를 한 번 더 안아주고 토닥여 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결국은 스스로 서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부여받은 운명이 태어날 때부터 보이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를 과연 용감해질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 모르기 때문에,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희망을 부여잡고 간다. 


Nothing is ever hopeless.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어. 절대로 희망이 없는 것은 없다는 말. 


결국 어디에든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가끔 나를 돌아보면 pathetic 절망적이라고 여겨질 때가 있다. 이렇게 게으르고 무계획적이고 실행에 옮기다가 말고....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싶다. 선생으로 부모로 자격이 있나 싶다. 그래도 또 내일을 모르고 내년을 모르기 때문에 한가닥 희망을 품고 오늘은 지낸다. 그러니 모르기 때문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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