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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Jul 20. 2024

두 딸이 흘린 눈물의 대가

"야!!!!!"


오후 4시 20분, 나는 둘째에게 소리를 질렀다. 전화로. 오늘은 작곡 레슨을 받으러 가는 날이다. 한 번은 늦잠을 자느라 시간을 놓쳐서 못 갔고 한 번은 선생님 아이가 아파서 입원하는 바람에 집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그 전은 기말고사라 못 갔다. 그렇게 몇 주를 보내고 드디어 가는 날인데 부재중 전화가 10통이 떠 있다.


"엄마, 나 안 가면 안 돼?"

그래서 소리 질렀다. "야!!!!!"라고. 

둘째는 울먹울먹 한다. 늘 고집 세고 소심해도 당당한 아이가 울먹거리자 난 속으로 당황했지만 어이없음이 올라오려는 이 감정을 눌러 버렸다. 레슨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30분 남짓. 지금 서둘러 출발해서 버스를 타야 겨우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다. 이제 와서 시간을 변경할 수도 취소할 수도 없다. 이 얼마나 민폐란 말인가. 선생님 아이는 아직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레슨해 주려고 시간을 빼서 왔단 말이다. 내가 소리 지른 이 '야'라는 한 글자에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것이 다 담겨 있었다.


둘째는 울면서 말했다. "그냥 가라고 하면 되지 왜 소리를 질러." 나는 다다닥 설명을 한다. 사실 설명하는 시간조차 아깝다. 아이가 빨리 가서 늦지 않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내고 나는 넷째와 병원에 다녀와서 3시간 만에 둘째를 마주한 것이다.


맛있게 피자를 먹던 아이는 아까의 일이 언급되자 갑자기 닭똥 같은 - 정말로 닭똥같이 굵은, 어쩌면 토끼똥 같은 - 눈물을 뚝뚝뚝 떨어뜨렸다. 보통 저렇게 서럽게 울지 않는데 내가 한 것이 그렇게 잘못인가 싶어서 이번엔 나도 당황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이제 책상에 앉아서 잠깐 정리를 하는데 큰 아이가 표정이 굳은 채 다가온다. 큰일 났다는 것이다. 왜? 오늘 교육 실습을 신청해서 다녀오는 날이어서 잘 받고 잘 다녀왔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싱가포르에서 아이네 학교로 견학을 오는 학생 한 명을 가이드해 주는 일일통역사의 역할을 맡기로 했던 시간과 실습 시간이 겹친다는 것을 당일인 오늘 아침에사 알았다고 했다. 

"교육 일정표 나와 있지 않았니?"

"보긴 했는데 나는 하루 종일 한다고 생각을 못 했지..."

그렇다. 좋게 말하면 태평하고 여유가 넘치고 딱 잘라 말하면 느슨하고 대강대강인 큰 아이는 일정을 지레짐작해서 점심 정도에는 학교로 돌아오겠거니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큰 딸에게 통역을 부탁했던 선생님은 일단 교육실습은 잘하고 오고 다만 월요일 1교시 이후 교무실로 오라고 하셨단다.


나는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참에 큰 교훈을 배웠으니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안 하겠다고, 오히려 잘 되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큰 아이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내가 지금 바라는 건 해결책이 아니라고!" 아..... 그래...... 나도 안다. 가끔은 너의 슬픔과 속상함에 그저 무작정 공감해 주는 것이 낫다는 것을. 그런데 그냥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는 엄마가 되기엔 큰 아이의 이런 경우를 너무 많이 봐서 또 한 번의 새로운 공감을 하기엔 솔직히 말해서 영혼이 조금 버석거린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한 두 번이 아니라 수십 수백 번의 이런 경우를 보게 된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어이구 자업자득이지. 좀 꼼꼼하게 보지 그랬냐.'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것이다. 이런 말을 대놓고 하진 않았다 물론. 다만 이렇게 겪었으니 다음엔 좀 더 잘하겠지 싶어서 핸드폰의 달력앱에 중요한 일정은 다 기록할 것을 말해 주는 찰나에 큰 딸이 엉엉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미안하다.... 그래서 아빠한테 가라고 했다. 나보다는 잘 위로해 주겠지. 


둘째가 와서 말한다. "엄마! 방금은 정말로 너무나 T적인 태도였어요."

"야. 너도 학교에 있어봐. 이렇게 되나 안 되나. 감정에 휘둘리다 보면 선생님을 할 수가 없어!"

"그건 아니거든요. 아무리 감정적인 사람도 무조건 그러진 않는다고요."

이럴 땐 둘이서 또 척척이다. "아까도 나한테 그렇게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 안 되죠. 나는 그냥 안 가도 되는지 물어본 것뿐인데." 그러더니 또다시 엉엉 울었다. 


그러니까 나는 집으로 오는 길 다른 차들을 나름으로 배려하고 내 앞의 오토바이에게는 경적을 울리지 않아 잘했다고 만족스러워하는 사이에 정작 가까이 있는 내 딸들의 마음은 토닥이지 못해 눈물을 쏟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엉엉 울면서 갔어도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이리저리 말을 걸어주니 나보다 나은가 싶기도 하고 이래서 애들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서러워 엉엉 울어도 눈 꿈쩍 하지 않던 우리 아빠의 모습이 왜 갑자기 떠오르는 것인가. 할머니의 사랑을 못 받아서 얼마나 슬펐는지 그랬냐 라는 한 마디 못 해 주시냐고 엉엉 울어도 아무 말씀 하시지 않던 우리 아빠. 하아...... 그 아빠에 그 딸이다. 할 말 없다 정말로. 


둘째의 두 번째 눈물에 이번에는 위로해 줄 수 있었다. 미안하다. 서러웠냐. 그래서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 괜찮은 둘째를 보면서 이 글을 적는다. 이렇게 아이랑 실랑이를 벌이며 한 걸음 늦게, 열 걸음 늦겠지만 또 배워간다. 


어제 스텔라 작가님이 보내준 심리테스트의 한 부분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사회성을 학습했어요." 그렇다. 나는 지금의 잘 웃고 잘 듣고 공감을 잘해 주는 (최소한 밖에서는) 사람이 되기까지 수많은 진통의 시간을 거쳐왔던 것이다. 그 심리테스트에서 나는 범고래가 나왔는데 나온 말들은 이러하다.


리액션에 영혼이 없어요

극강의 효율을 추구해요

워커홀릭이에요

잡생각이 없어요

사회성을 학습했어요

내 사람이다 싶으면 잔소리 휘몰아쳐요

손익계산을 잘해요

너무 직설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혼자 자기계발하는 게 취미예요

뭐든 확실한 걸 좋아해요

빈말 잘 안 해요

시간 낭비 싫어해요

계획 틀어지는 거 엄청 싫어해요

논리적으로 납득되면 바로 인정해요

유튜브는 기본 1.5배속으로 봐요


어쩌면 이렇게 다 맞을까 싶었다. 다만 처음과 마지막은 조금 고개를 갸웃했는데 오늘 일을 겪고 보니 리액션에 영혼이 없다는 조금 납득이 간다. 그리고 유튜브는 아예 거의 보질 않는다. 시간 낭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한 정보나 감동을 눈으로 빠르게 읽고 잡아낼 수 있는 활자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가끔 친구들이 보라고 보내 준 영상 링크는 '나중에 봐야지'라고 생각해 놓고는 까먹고 잊다가 "봤어?"라는 말에 아차 싶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아직....."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99퍼센트이다. 


이렇게 시간 효율의 극대화를 추구하고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정말로 싫어해서 미리 몇 번이고 확인하고 중요한 일정은 반복해서 기억하는 나와 대강대강 흐르면 흐르는 대로 가려는 큰 딸은 사실 잘 안 맞는 면이 많다. 그래서 오늘도 아이에게 이러면 도움이 되겠다 싶은 말을 했는데 큰 아이의 눈물의 원인은 알고 보니 다른 데 있었다. 본인이 한심하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몰라주고 엄마는 엄마의 방식으로 조언을 해 주고 있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잔소리처럼 반복하는 형국이었을까. 이렇게 눈물이 많은 큰 아이를 제일 잘 이해하고 위로도 잘 해 주는 건 의외로 매일같이 싸우는 바로 밑의 동생인 둘째다.


내 베프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자기애가 강하고 효율성을 추구하고

호기심이 많고 도전적이고

감정표현이 직설적이고 자신에 대한 기준이 높고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성격이 급하고 자기 신뢰가 강하다

폼에 살고 폼에 죽고 매우 현실적이다

감성팔이 딱 질색

단순 명쾌한 스타일

행동력 추진력이 엄청나게 좋고

사교적인데 공감능력이 다소 부족하다니...


그래서 너랑 나랑 절친이구나 싶었다. 두 딸은 나와 정반대로 생각도 많고 느릿느릿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아마 혈연이 아니었으면 서로 가까워지지 않았을 사이이긴 하다. 딸들로 인해서 젊을 때 이리저리 피했던 나와 안 맞는 관계들과 잘 지내보려고 잘 살아보려고 나이 마흔이 넘어서 이렇게 노력하며 애쓴다. 결국 살면서 겪을 것은 겪고 부딪칠 것은 다 부딪치게 되어 있다 보다. 대가는 딸들의 눈물이니 좀 비싸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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