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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Jul 26. 2024

나만 책에 파묻힌 게 아니었어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엄마가 이상하다. 배가 아프다고 누워서는 나에게 책을 가져다 달라고 시킨다. "책상 위에 있어. 실패한 문장들이던가. 완벽한 문장들이던가. 여튼 그래." 제목은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이었다. 이번에는 에어컨 리모컨도 가져다 달라고 한다. 갖다 주면서 "꺼 줘요."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꺼도 되는데 여튼 엄마가 꺼 주었다.


배가 아프다면서 진지한 표정을 책을 펼치고 열심히 읽는다. 배가 아픈데 책을 읽다니 그 부분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읽으면서 혼자서 킥킥거리고 "아!"하고 탄성도 지르고 다시 빵빵 터진다. 그림도 하나 없고 표지도 딱히 눈에 띄지 않는 책이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아침에도 읽고 밤에도 읽고 한단 말인가. 아, 물론 나도 좋아하는 책이 있다. <<푸른 사자 와니니>>는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6권도 샀다. 엄마는 초등학교 6학년이나 되었으면 이제 다른 책도 읽어 보라고 하신다. 다른 책도 읽긴 하지만 '와니니'의 매력을 뛰어넘는 책은 삼국지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아무튼 내가 선발 투수로 뛰고 있는 야구 시합에 와서도 책을 읽고 있는 엄마는 가끔 나보다 책이 더 좋은 것 같다. 집에는 책이 넘쳐나서 책장이 없는 벽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집에 책이 너무 많아서 살 수가 없어! 사람이 아니라 책이 사는 집 같아! 책을 좀 정리해야겠어!" 라면서 야심 차게 몇 백 권의 책을 빼서 정리를 하긴 했다. 천장까지 닿는 거대 책장을 하나 버리고 작은 책꽂이 두 개도 없애긴 했는데 여전히 우리 집에 흰 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는 이번 방학에 책을 더 정리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밝혔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왜냐면 날마다 택배 박스가 오기 때문이다. 가끔 식품이나 잡화가 오지만 내가 말하는 택배 박스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알라딘, 교보문고, 예스 24.... 이제는 나도 알겠다. 세상에는 온라인 서점이 이렇게 여러 종류가 존재하고 엄마는 돌아가면서 책을 끊임없이 주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넘쳐나는 포인트로 가끔 굿즈도 주문해 준다. 내 스파이더맨 지갑과 누나가 들고 갈 여행용 가방도 모두 다 온라인 서점 굿즈들이다. 돈이 없다면서 책 살 돈은 없지 않은 것 같다.


책을 정리하면 뭐 하고 책장을 갖다 버리면 뭐 하는가. 빠지는 그 이상으로 책이 오는 것 같다. 택배박스만 오면 다행이지. 가끔 나와 누나에게 심부름도 시킨다.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상호대차로 빌린 책이 도착했으니 빌려오라는 것이다. 학교 도서관에서도 열 몇 권씩 가져오는 우리 집은 도서관 책들과 새로 산 책들과 원래 있던 책들이 마구 섞인 혼돈의 도가니이다. 도가니탕이다. 하도 펄펄 끓어서 도가니를 넘어서 탕이 되어 버렸다. 엄마네 학교 도서관에서는 단골 연체자라고 한다. 하지만 교사 특전으로 연체는 용서가 된다는 것이다. (사서 선생님한테 한 소리 듣기도 했다고 멋쩍어 하며 말하긴 했다.) 학교 도서관 책과 지역 도서관 책이 가끔은 섞여서 아슬아슬 잘못 반납될 뻔한 것은 부지기수다. 왜 여기저기서 그렇게 빌려오는지 모르겠다. 그렇다 보니 책상에도 책이고 식탁에도 책이고 방바닥은 물론 (당연하게도) 책들로 덮여 있다. 책꽂이 사이사이에는 아무렇게나 꽂아놓은 누워있는 책들이 꽉 차 있고 심지어 현관 옆 선반에도 책들이 빼곡하게 자리잡고 있다. 저 책들을 다 읽기나 하면서 사고 빌려오는 것인가 의심만 하기에는 항상 뭔가를 읽고 있기는 하다. 


언젠가 엄마가 한탄처럼 하는 이야기도 들었다. "저는 제가 책을 열심히 읽으니까 아이들도 자연히 다 따라서 읽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공부도 열심히 하니까 알아서 열심히 하겠지 했는데.... 저 혼자만 책을 읽고, 저 혼자만 공부를 하고 있더라고요. 집에 사람이 여섯 명이나 있는데 공부하고 책 읽는 사람은 저 하나뿐이에요." '세상에 공부보다 책 보다 재미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하는 생각을 하지만 대놓고 말하진 않는다. 전에 두 어 번 대놓고 말했다가 "아들아, 네가 뭘 몰라서 그렇단다. 정말 제대로 재미있는 것은 책이거든. 왜냐하면.... 블라블라." 하는 일장 연설을 몇 번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혼자 읽게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는 것은 일찌감치 터득했다.


엄마는 매년, 아니 수시로 정리를 하겠다면서 지난 번에는 새해 목표가 미니멀리즘이라고 했다. 우리는 속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책을 사놓고 읽던지 안 읽던지 하여간 우리 집에서 책이 사라지고 빈 벽과 소파가 장식하는 그런 '다른 집' 같은 거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을 나를 비롯한 우리 4남매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책을 없애도 거실에만 6개가 있는 책장을 포함해 모든 방과 베란다와 주방에까지 있는 모든 책을 없애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생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엄마는 또 킥킥거리더니 이런 문장을 읽어준다(읽어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야, 그리스인 조르바에 이런 문장도 있었대. 들어봐 봐.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놓고 불이나 싸질러버리시구려.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나도 조르바 읽었는데 왜 기억이 안 나니. 크크크." 조르바는 엄마가 지난번에 읽고 책장에 세워놓아서 나도 오며 가며 책 표지는 보았다. 무슨 내용인지는 물론 모르고 딱히 관심도 없다. 혼자서 계속 쿡쿡거리던 엄마는 벌떡 일어나 조르바를 펼친다. 


저렇게 이 책 저 책 읽다가 건너뛰고 또 다른 책들을 동시에 꺼내놓고 읽고 있으니 엄마는 우리에게 잔소리를 그만해야 한다. "너네 바닥에 놓은 책들 다 치워!" 나는 그때마다 속으로(만) 생각한다. '엄마 책들도 좀 치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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