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읽고 나서 알았다. 소설이라는 것을. 심지어 표지에 떡하니 '이슬아 장편소설'이라고 적혀있는데 그냥 가뿐하게 무시했던 것이다. 일부러 무시한 것이 아니라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이슬아를 알게 된 것은 오래전 EBS에서 우연히 듣게 된 이스라디오에서였다. 차분차분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듣는 그녀의 이야기는 퇴근길의 동무가 되어 주었다. 가끔 집에 도착했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조금 더 듣고 싶어 차에서 머무르기도 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신기한 제목을 보았다. '가녀장의 시대'. 새로운 단어인데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소설인 줄 모르고 읽었다. 당연히 그녀의 실제를 담은 수필집이겠거니 했다. 이스라디오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물론 실제의 이야기를 담았지만 재구성하고 다르게 담았다는 사실을 제일 마지막에 알았다. 이것이 실제라니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읽었던 놀라움은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약간은 김이 푸시시 빠지기도 하고 오히려 조금은 안도가 되기도 했다. 저자의 말처럼 '아직 본 적이 없는 가족드라마'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정이 있다면 매우 놀랍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서로를 놀라우리만큼 존중한다. 가끔은 대놓고 까내리기도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어떤 비난이나 얕잡아 보는 것은 없다. 그냥 다름을 이야기하고 그것으로 끝이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해한다.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알아간다. 이것은 기성세대에서는 어려운 부분이다. 자녀들은 부모가 우리의 마음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부모는 자녀들이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기를 바란다. 나라고 다르지 않다. 내 아이들이 다 엄친딸 엄친아가 되어서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겸손한 척 가식적인 웃음을 호호호 지으면서도 어깨에는 힘이 올라가 있고 입꼬리도 그만큼 치솟아 있겠지. 불행하게도 나는 엄친딸 근처에는 조금 가 볼까 하다가 결국에는 부모님께 실망을 여러 번 안겨드리는 자식이었고 내 아이들도 그닥 다르진 않은 것 같다.
엄마가 이걸 같이 해 주면 좋겠고 아빠는 내 이런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 그래서 마흔이 넘은 이 나이에 할머니에 대한 서러운 추억과 감사한 추억을 담아 쓴 글을 두고 전화로 질책을 받는 자리에서 흐느껴 울지만 아빠는 미동도 없다. 엄마는 슬쩍 발을 빼신다. 고집 센 두 부녀 사이에서 난감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서는 오랫동안 세월을 함께 해 온 아빠의 편을 조금 더 들 수 밖에는 없다.
종교라는 기본적인 배경이 없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싶지만 그럼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아빠의 마음과 그 곁에서 아빠를 존중하고 존경하면서 한평생을 같이 해 온 엄마의 마음은 결국은 한 방향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기독교라는 신앙이 마음에 들어오기 이전에도 올곧은 할아버지의 정직과 성실이라는 기치는 늘 아빠의 마음에 있었기에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비슷한 듯 보수적인 듯 하지만 자꾸 이리저리 삐죽이 삐쳐 나가려는 큰 딸은 늘 아슬아슬 위태위태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은 이슬아 작가의 삶이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설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조금은 안도의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실제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을 알기에 약간의 허탈함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제일 좋았던 부분, 그녀의 목소리로 들을 때에도, 그녀의 글로 읽을 때에도 좋았던 부분은 '복희는 생각한다'라는 장이다. 아이들의 글을 들으면서, 고구마 마탕을 해 주면서 슬아의 어머니 복희는 생각한다.
태어나서 좋은 점은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다.... 태어나서 안 좋은 감정을 느낄 때도 종종 있다.... 어쩔 땐 태어나서 기쁘고 때때로 슬프기도 하다.....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도 태어나서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로 태어나고 싶다. 내가 언제나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내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슬아 글쓰기 교실에서 이와가 쓴 글을 낭독하는 것을 들으면서 복희는 자기도 모르게 운다. 슬아는 이와에게 말한다.
"네가 너무 아름다운 걸 써서 그래."
언젠가 이슬아 선생님 글에 등장하고 싶다던 이와는 이렇게 등장했다. 그 후의 이야기는 모르긴 몰라도 이와는 뿌듯한 마음으로 글을 더 열심히 썼을 것이다.
유명작가의 삶 같은 건 코딱지만큼도 부럽지 않지만 복희는 실감한다. 글쓰기의 세계가 얼마나 영롱한지를. 오랫동안 그 곁에서 고구마 마탕이나 해 주고 싶다고 복희는 생각한다.
이슬아의 글은 담담하게 한 방을 찌른다. 최선을 다해서 치열하고 열심히 피곤하게 사는 삶 곁에 다른 방식으로 열심히 일하고 그 후에는 드라마와 tv 시리즈를 보면서 마음 편하게 웃으며 사는 삶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요가를 하고 엄격하게 간식을 조절해서 깔끔하게 젓가락으로 과자를 집어 먹고 저녁 7시 이후에는 간식을 일절 먹지 않으며 밤늦게 영어 공부를 하는 딸 곁에서 유튜브 선생님들에게 다양한 것을 배우고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면서 졸기도 하다가 법륜 스님의 영상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딸을 지켜보는 엄마의 세계가 함께 가고 있다.
글쓰기의 세계는 아름답고 그 글의 여운을 느끼는 것도 아름답다. 내 삶이, 나의 삶과 비슷한 삶이 글 속에서 투영되고 다른 시점에서 다양하게 풀어져 가는 것을 보며 내가 살아보지 못한 모르는 사람들의 생활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다. 굳이 나까지 그렇게 치열하게 글을 쓸 필요는 없다. 그래서 그 옆에서 고구마 마탕을 해 주면서 글이 안 써진다고 괴로워하는 아이들을 도닥여 주고 함께 그 슬픔과 기쁨을 나누는 것으로 나는 충분한 것이다. 그렇게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글을 더 잘 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또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감히 작가라는 이름을 달고 글을 쓰는 것은 어딘가 독자라는 이름으로 이 어설픈 글을 읽어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글을 써 본다. 이슬아 스타일로 내 삶과 아이들의 삶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을 해 보면서.
고구마 맛탕의 맛탕이 마탕이라는 한자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 책을 읽다가 궁금한 마음에 찾아보고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낮잠 출판사인데 헤엄 출판사라고 되어 있어서 저자가 15000원 짜리 책을 1500으로 실수한 것처럼 또 실수한 건가 싶다가 이 부분이야말로 진짜로 소설 속 설정이라는 것도 알고 혼자서 헛웃음도 지어 보았다. 책 속에서 나온 달콤쌉싸름한 초콜렛도 읽어봐야지. 세상에는 좋은 책이 참 많아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