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개의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연습 부족이다. 정확하게는 시간 부족이다.
드디어 헌정을 연주하는 날이었다. 두 달도 안 되는 동안 곡을 이해하고 파악하려고 몹시 애를 썼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어떤 곡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몸에 익히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보통 기본적으로 4개월 정도, 그리고 그 이상 걸린 적도 많았다. 그런데 헌정을 연주하기까지 주어진 기간은 고작 두 달이 채 되지 않아서 마음이 초조했다. 대학생 시절처럼 매일매일 몇 시간씩 연습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내 일에만 몰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 변수가 하나 더 생겼으니, 손가락에 박힌 가시였다. 지난주 수요일인가. 밤에 갑자기 따끔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쓰다듬어도 느껴지는 것이 없는데 가시가 박힌 듯 몹시 아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혀로 쓸어보니 살짝 아주 작은 까실한 느낌이 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안 보이니 어디에 있는지 조차 가늠이 안 된다. 이미 밤은 늦었고 내일 아침에 보건 선생님께 들려서 봐 달라고 할까 하는 정도로 생각을 했다.
다음 날 아침 등교는 했으나 바쁘니 오후에 들려야지 싶었다. 그 아침까지만 해도 가시에 찔렸을 때 쿡쿡 아픈 그 느낌도 있고 여전히 혀로 쓸면 까슬거렸는데 오후가 되니까 갑자기 사라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절로 빠졌나 싶었다. 그런데 아픔이 간헐적으로 느껴지면서 점점 안쪽으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잊고 있었다. 통증이 지속되었다면 그날이라도 병원에 갔을 텐데, 별 거 아니겠지 싶었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이 되니 손가락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주 살짝,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정도로 부었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이 되니까 더 많이 부었다. 이거 큰 일이다. 병원에 가서 째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째면 피아노는 못 친다. 그리고 병원에 들를 시간도 없었다. 셋째를 야구 시합에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손가락과 공연을 바꾸기로 했다. 병원은 월요일 오후에나 가야지. 두 달간 공들여 연습하고 마지막 두 주는 이삼일 간격으로 레슨을 받으며 정말로 열심히 쏟아부었다. 드디어 디데이. 연습실에 조금 일찍 가서 한 번 쳐보니까 괜찮은 것 같다. 악보를 안 봐도 될 것 같은데.... 그러다가 마지막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틀려버리면 너무 당황스러울 것 같다. 한 달 정도만 더 있었어도 곡을 좀 더 몸에 익힐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기엔 너무 짧았다.
고민 끝에 악보는 마음의 안정용으로 펼쳐 놓기로 했다. 드디어 내 순서. 안 떨릴 줄 알았는데 정말 미치도록 떨린다. 손가락은 차갑고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못해 끈적인다. 다른 분들도 긴장한 것은 느껴지는데 나만 빼고 다 잘 치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원래 이렇게까지 긴장하지 않는데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심하다.
어찌 되었건 인사를 하고 곡 소개를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선생님은 악보 없이 치라고 하셨지만,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반만 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악보를 올려놓았다. 앞부분 세 페이지에서 간혹 알면서 깜빡하고 틀리는 부분이 세 군데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끝에서 세 번째 마디도 자꾸 틀리게 짚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야 뭐 안 봐도 괜찮겠지....
이렇게 떨린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진짜 손가락은 미친 듯이 달달 떨리고 심지어 페달을 밟고 있는 다리마저 떨리는데 그와 상관없이 연주는 흐른다. 마음의 안정용으로 펼쳐놓은 악보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곡이 어떻게 중간까지는 어찌어찌 잘 간 것 같은데 아르페지오로 몰아치는 부분부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그즈음부터 몹시 빨라져서 다다다다 달린 것만 기억이 난다. 하이라이트를 지나서 마지막 마무리 되는 부분은 제일 쉬운 부분인데, 늘 그렇듯이 틀릴까 싶었던 끝에서 세 번째 마디가 아니라 그다음 예상치도 못한 부분이 기억이 나지 않으면서 삐끗 틀렸다. 거기는 악보를 아예 넘길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악보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끝났다! 연습 때보다 리허설 때보다 훨씬 안 되었으나 어찌 되었건 끝났다!!! 그러나 긴장이 확 풀리면서 떨림도 멎었다.
일단은 이렇게 헌정과 바이바이이다. 내년이나 후년 봄 정도에 조금 더 다듬어서 다시 한번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두 달간 너무 몰아쳐서 시간을 보냈다. 천천히 길게 조금씩 가는 내 주의와 맞지 않아서 고생도 많이 했다. 그래도 좋았다. 20년 전 서혜경 피아니스트 연주로 알게 된 이 곡은 그동안 언젠가 쳐 보고 싶은 곡 중 하나였는데 아쉬움은 남아도 소원은 일단 이루었다. 연주회가 끝난 뒤에 느껴지는 이 독특한 만족감은 어찌 되었건 최선을 다한 결과이다. 이제 행복하게 다음 곡을 고민한다. 정말 안 친한 베토벤과 친해져 봐야 할지 아니면 짝사랑하는 모차르트랑 만나 볼지, 역시 언젠가 쳐 보고 싶었던 브람스 랩소디 2번을 해 볼지는 조금 더 생각을 해 봐야겠다.
사족 1. 손가락은 여전히 부어 있고 뭔가 까만 미세한 점 같은 것이 피부 안 쪽에 보이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 아는 의사 선생님께 여쭈어 보니 병원에 가도 딱히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고 너무 아프면 소염 진통제를 먹으며 저절로 이물질을 둘러싸 굳은살이 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니면 곪아서 째야 할 때 빼내는 경우 밖에 없다고..... 둘 다 싫지만 그냥 굳은살이 나을까 싶기도 하다. 곪으면 너무 아픈데....
사족 2. 어제 연주회가 끝난 후 뒤풀이로 와인을 겨우 두어 잔 마셨을 뿐인데 하루 종일 숙취가 가시지 않아 힘들었다. 아아.... 이제는 정말 알코올도 안 받는 나이가 된 것인가..... 슬프다. 다음에는 한 잔만 마셔야 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