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2부
파친코를 원서로 읽고 있다. 모국어인 한국어가 아니라 한 단계 필터링을 거쳐서 영어로 읽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타국에서의 이야기는 어쩐지 역시 한 걸음 떨어져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국인이지만 미국인인 작가의 시선에서 낯익음과 낯설음을 동시에 느낀다. 내게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인인 한국계 조카들이 꽤 많이 있다. 외가와 친가 모두 사촌들이 어쩐 이유에서인지 상당수 미국으로 건너간 이유에서이다. 한국계 미국인 친구들도 좀 있다. 그들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을까.
내 친구는 자신은 "미국인"이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 비록 한국사람과 똑같은 외모와 한국인 부모가 있고 한국 문화를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런 이야기는 유명 유투버 에미리 츄의 한 에피소드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국인 부모들은 유독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리키고 한국말을 잘할 수 있도록 굉장히 애를 쓰고 친척들과의 유대 관계도 쌓아 올리려고 하지만 본인들은 그것은 부모 세대의 문화와 가치관일 뿐 나는 미국인이라는 것이다.
문득 이 부분이 생각이 난 것은 파친코에서 3세대의 노아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면서 그가 가진 고뇌와 갈등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노아는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고 드디어 와세다 대학교 영문학부에 입학한다. 그는 행복했다. 마음껏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Waseda was pure joy to him. He read as much as he could without straining his eyes, and there was time to read and write and think. .... Hansu had procured for him a well-appointed apartment and gave him a generous allowance, so Noa did not have to worry housing, money or food. .... Hansu never told him to study, but rather to learn, and it occurred to Noa that there was a marked difference. Learning was like playing, not labor.
와세다는 그에게 순수한 기쁨이었다. 그는 눈을 혹사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많이 읽었다. 읽고 쓰고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한수는 모든 것이 구비된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고 용돈도 넉넉히 주었기 때문에 노아는 주거나 돈이나 음식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한수는 그에게 절대로 공부하라고 하는 대신 배우라고 말했다. 노아는 그 말에서 뚜렷한 차이를 발견했다. 배움은 유희와도 같았다. 노동이 아니라.
이 부분이 매우 공감이 가는 것이 나 역시 영문학을 공부할 때 그 기쁨을 느꼈기 때문이다. 영문학에서 시작해서 대륙의 문학이라고 불리는 유럽 대륙의 대문호들의 작품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읽었다. 한동안 삶의 목적에 대해서 알고자 했을 때는 괴테와 서머싯 몸의 책들을 모조리 다 읽으면서 공감과 실망을 느끼기도 했다. 어떻게든 르네상스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인문학의 정신을 알고 싶었다. 배움이 순수한 기쁨이 될 수 있고 책을 통해서 과거와 연결되면서 그들이 걸었던 동일한 고민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은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If he had an embarrassing wish, it was this: He would be a European from a long time ago. ... If anything, he wanted a very simple life filled with nature, books, and perhaps a few children. ... In his new life in Tokyo, he had discovered jazz music, and he liked going to bars by himself and listening to records that the owners would select from bins.
그에게 부끄러운 소망이 있었다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오래전 시대의 유럽인이었으면 했다. 오히려 그는 자연과 책과 그리고 어쩌면 아이가 몇 있는 아주 소박한 삶을 원했다. 도쿄에서의 새로운 삶 가운데 그는 재즈 음악을 알게 되었고 바에 가서 주인이 큰 상자에 선별한 레코드 음반들을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노아가 유럽인이기를 바랐던 그 소망을 나는 이해한다. 예전에 유럽의 귀족들이 그 자제들을 이탈리아로 보냈다던 이탈리아 견문 여행을 나는 몹시 부러워했다. 젊은 시절에 과거의 유산을 보면서, 그 문화를 느끼면서 견문을 넓히고 사고와 시야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그 무엇보다 가치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 똑똑한 여학생이 공부를 하면서 유럽의 상류층과 교제를 하면서 느낀 점을 적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 아시아 계이며 딱히 상류층이 아닌 자신의 신분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나왔다 - 그로 인한 좌절감과 설움을 여러 번 언급했다. 강남에서 고액 과외를 받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고 예술과 인문학적 소양이 충분할 만큼 교육도 받고 스스로가 학구열도 강하니 한국에서는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외국의 상류 계층이 세우는 벽으로 인해서 스스로 괴로워하는지 읽는 내내 그녀가 안쓰러우며 동시에 그로 인해 답답한 마음에 괴로워했다. 읽고 나서 생각한 것은 차라리 한국의 것을 제대로 공부해서 그것을 너의 강점으로 세워 접목시키라는 것이었다. 서양의 것을 아무리 파고든다 한들, 그 안에 내 정체성인 한국적인 것이 없다면 결국은 겉만 그럴싸한 텅 빈 장식일 수밖에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후로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잘 모르겠다. 또 한 권의 책을 펴 냈다고 하는데 읽지는 않았다. 이미 나보다 훨씬 박학다식하며 교양이 넘치는 그녀이니 스스로의 삶을 잘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고 굳이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책 속 노아의 마음도, 그리고 그녀의 마음도 이해한다. 우리는 결코 그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비록 인문학과 예술에 매료되어 수많은 책을 읽고 그에 가까이 다가서고자 한들, 그 학문과 지식은 한국 사람인 내게 온전히 내 것이 될 수는 없는 독특한 문화적인 면과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Noa didn't care about being Korean when he was with her, in fact, he didn't care about being Korean or Japanese with anyone. He wanted to be, to be himself, whatever that meant; he wanted to forget himself sometimes. But that wasn't possible.
노아는 그녀(아키코, 여자친구)와 있을 때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상관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누구와 있던지 자신이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하는 부분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 자신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던 간에 말이다. 그는 때때로 자신에 대해서 잊고 싶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어떠한 국적이나 인종으로 구분되지 않고 그냥 순수하게 나 자신이 되고 싶고 그렇게 인정을 받고 싶은 저 마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불가능한 것도 역시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어떻게 나의 국적을 떠나서 나의 정체성이 정의된다는 말인가. 이것은 정말로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것이다.
I have withdrawn from Waseda..... This is the best way for me to live with myself and to maintain my integrity.... I will send you something as often as I can. I will not neglect my duties.
저는 와세다에서 자퇴했습니다. 그것이 제 자신으로 살고 저의 온전함을 유지하는 최선이었습니다. 저는 할 수 있는 한 자주 뭐라도 보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제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본인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노아는 떠난다. 그토록 사랑하던 와세다 대학교에서의 공부를 중단하고 유복하게 지원을 받은 것을 모두 떨쳐내고 스스로의 힘으로 직업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비록 그의 수입이 보잘것없을지라도 자신이 받은 것은 모두 갚겠다는 것.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았을 때, 과연 지금 내가 가진 이러한 모든 것을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는 그가 소망하던 유럽인은 아닐지언정 그와 비슷한 삶과 문화를 향유하며 적당히 타협하는 자세를 취할 수도 있었다. 이미 그를 차고 넘치게 후원해 주는 생물학적 친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마음 한 구석에 자랑스럽게 꺼내 보이기는 어려운 소망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노아가 스스로 embarrassing wish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아마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다소 있을 리가 없는 그런 소망은 말로라도 한 적이 없다. 다만 외국으로 어려서 유학을 갈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다는 바람 정도는 늘 가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결국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은 결핍이다. 다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다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다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알고자, 하고자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핍된 문화 속에서, 아니 결핍이 아닌, 다른 공간에 있는 문화 속에서는 속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또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바깥에서 또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어쩌면 특혜이자 특권인 것이다. 결국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은 얼마나 가지고 태어났는가 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스스로 일구어 가면서 얼마나 성장하는가이다. 말이 쉽지 사실은 힘들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금수저의 삶이 얼마나 좋을지는 상상도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유유자적하는 금수저의 삶이 아니라 한결같이 진지하게 노력을 하는 착하고 곧은 심성의 인성까지 갖춘 금수저들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 부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한탄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부러움은 부러움대로 놓아두고 나는 오늘도 이만큼의 교육을 받고 이만큼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한국사람으로서의 나로 살 수 있음에 한 번 더 감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