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교실을 떠난다. 오늘은 아들의 시합이 있는 날. 6시 20분에 시합이 강원도 인제 야구장에서 있다. 금요일이라 차가 막힐 것은 당연하다. 언제 떠나는 것이 좋을까. 2시 40분에 나갈 수 있도록 조퇴 신청은 되었지만 교실 정리와 수업 준비를 마치고 나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화장실도 들리지 못한 채로 차에 올라탔다. 주유소에 들러야 할 것 같은데 그럴 시간도 없다. 집에 들러서 밥이라도 조금 준비해 놓고 정리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지만 그러면 백 퍼센트 경기를 놓칠 수밖에 없다. 하여 그냥 출발하기로 한다. 짐은 아침에 미리 실어 놓았다. 올림픽 대로로 나가는 곳까지만 한참이 걸렸다. 서울 끝자락에 겨우겨우 도착해서 가평휴게소에 들렀다. 보통 혼자 운전하면 휴게소를 들리지 않지만 일단 주유가 시급했다. 중간에 주유소가 도통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커피도 사지 않고 화장실만 들렸다 다시 액셀 페달을 밟았다.
한참을 달린 것 같은데 아직도 가야 할 길이 43km. 산자락 뒤로 황홀한 연보랏빛과 분홍빛이 섞인 찬란한 노을이 펼쳐지는 듯 하지만 즐길 여력도 돌아볼 여유도 없다. 저쪽 내 앞으로는 이미 저녁의 어스름이 내려앉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번 달에만 강원도에 세 번을 간다. 이미 지난달에는 양구에 한 번 다녀왔고 지난주에는 횡성, 이번주는 인제, 다다음주에는 홍천이다. 어쩌면 이렇게 다양하게 강원도의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는지, 다 아들 덕분인 것을 감사해야 하나 싶기엔 따라다니는 몸도 마음도 조금은 고달프다.
산자락에는 밤이 빨리 내려앉는다고 했다. 어둠 속 처음 오는 길이 낯설어 살짝 헤맬 뻔하다 3시간 만에 도착하니 이미 2이닝 시작이다. 오늘의 선발투수는 아들인가 보다. 전광판을 재빨리 쳐다보니 무실점이다. 침착하게 마무리하는 아들에게 환호와 격려가 쏟아진다. 그렇게 2이닝도 무실점으로 마무리. 우리 학교는 오늘 공격이 빵빵 터진다. 3이닝까지 깔끔하게 무실점으로 끝냈다. 중간에 살짝 위기가 있기도 했으나 수비 역시 완벽하게 받쳐준 결과이다. 그렇게 아들은 결과적으로 10대 4로 승리투수가 되었다. 타격도, 투구도, 수비까지 삼 박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그런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오늘만 같으면 너무 좋겠지만 늘 그럴 수 없는 것이 야구이다. 늦은 저녁을 먹고 잠깐 잠들었다 깨니 벌써 이튿날 아침이다. 서둘러서 야구장으로 향한다. 강원도의 아침은 혹독하다.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롱패딩이 필요할까 싶어 그냥 두고 온 나를 두고두고 탓했다. 결국 눈물과 콧물과 재채기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알레르기 약을 하나 먹고 경기와 경기 사이 막간, 쉬는 시간 동안 차에서 쓰러졌다.
이른 아침 저학년 경기가 나름의 성과를 잘 거두고 끝났고 1시에 고학년 경기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선발 투수는 다른 친구인데 조금씩 흔들리더니 1이닝에 3 실점, 2이닝에 2 실점을 한 상태로 만루를 만들었다. 심지어 노 아웃이었다. 그러자 투수가 교체되어 우리 아들이 마운드에 올라갔다. 옆에서 한 아버님이 농담처럼 한 마디 던지신다. "OO이 어머니 제일 싫어하시는 상황이네요." 나도 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그런데 꼭 이렇게 만루일 때 아들이 구원투수처럼 교체되어 올라가는 상황을 벌써 세 번째 보았다. 만루에서는 삼진으로 완벽하게 잡아내지 않는 이상 사소한 실책 하나가 대량 실점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처음 아웃 카운트 하나는 완벽하게 잘 잡아냈다. 바로 삼진. 하지만 역시 아니나 다를까. 추가로 2 실점을 더 해서 결국 4점을 주고 말았다. 그다음 이닝은 무실점으로 마무리. 이쯤에서 투수를 교체해 주시면 참 좋겠는데. 하고 이루어지지 않을 바람을 속으로만 되뇌었다. 어제 3이닝을 던진 아들의 어깨가 걱정된다. 5이닝은 길었다. 볼 넷으로 타자가 베이스로 나간 상태에서 수비는 원활하지 못했고 결국 3 실점을 했다. 그렇게 7대 10으로 우리 팀은 지고 말았다.
야구는 그렇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참패를 당하기도 하고 질 것 같다가 아슬아슬 이기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혼자서 하는 경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투수가 아무리 잘해도 수비하는 친구들이 실수를 하면 어쩔 수 없다. 공을 너무 빨리 던져도 너무 늦게 던져도 그 한 끗 차이로 분위기가 달라지고 점수가 달라진다. 공격도 마찬가지. 혼자서 아무리 잘해 봐야 앞 뒤의 다른 선수들이 잘하지 못하면 결국 잘해야 솔로 홈런으로 끝날뿐이다. 그래서 잘했다고 칭찬하고 격려를 할 수는 있어도 너 때문에 졌다던가 네 실수로 이렇게 되었다는 비난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등을 믿고 맡기는 마음과 그를 받쳐주고자 집중하고 합을 맞추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정말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쉽지 않은 부분이고.
이제 하루 남았다. 가끔 토일로 1박을 하거나 당일치기는 했어도 주말에 이렇게 통째로 2박 3일을 비우는 것은 나로서는 쉬운 일은 아니다. 멀고 먼 인제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 조금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기쁘게 올라가는 경쾌한 결과를, 서로를 신뢰하는 마음에서 이루어 낼 수 있기를.
이렇게 글을 썼지만 서울로 올라오는 발걸음은 조금 무거웠다. 어제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서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 아이가 한 번 더 할 수 있었겠지만 사흘 연속은 누가 봐도 무리이다. 선발과 마무리하는 친구들은 투수가 주력이 아니다. 앞뒤로 점수를 많이 내어 주었다. 우리는 홈런이 두 번이나 나왔지만 그때 베이스에 주자가 별로 없었다. 마지막 친구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내려왔다. 우리 팀이 마지막 순번이었고, 이미 누가 봐도 패색이 짙은 상황, 투아웃 투스트라이크였다. 심판은 스트라이크 존을 다소 넓게 잡으며 볼을 스트라이크로 판정했다. 여기서 이미 홈런을 두 번이나 친 우리 팀 타자가 홈런을 쳐 버리면 경기는 조금 지지부진해질 가능성이 있기는 했다. 일요일 저녁이라 다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도 이해한다. 여기서 승리한다고 우리가 1위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했는데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개운한 패배가 아닌 아쉬움이 많이 남는 패배에 아이들은 슬퍼했다.
하지만 나는 희망을 보고 결실을 보았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야구를 정식으로 시작한 지 이제 2년이다. 만 2년이 채 되지 않은 친구들이 더 많다. 그 시간 동안 아이들을 부단히 노력했고 이만큼 성장했다. 늦게 시작한 만큼 진심으로 야구에 임했다. 아무리 잘하는 사람들이라도 어느 정도의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그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를 기대한다. 내 친한 친구들, 동네 친구들이 다니는 집 앞의 학교가 아닌, 버스와 차를 타고 멀리 떨어진 학교까지 매일매일 오가며 하루에 몇 시간을 운동장과 체육관에서 보낸다. 공부하는 야구선수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학교의 생활도 꾸준히 하며 나름의 과제를 어떻게든 해내고자 한다. 억울한 마음이 들어도 승복하며 인내하는 법을 배운다. 더 잘하겠다고 다짐을 한 번 더 하며 마음에 새긴다. 기쁨의 순간은 함께 나누며 축하한다. 그리고 성장을 위해 또다시 노력하는 걸음을 걷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재작년 겨울, 몹시도 추웠던 어느 지방의 연습 경기에서 26개 3으로 두들겨 맞았던 일도, 비 오는 날 한 시간 동안 울면서 던진 그 끝나지 않을 것 같이 길고 길었던 이닝도, 홈런으로 두들겨 맞았던 그날도 모두 추억이다. 실패를 맛본 사람들은 그만큼 단단해진다. 꼭 프로야구선수가 되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어린 날, 젊은 시절, 이렇게 치열하게 뭔가를 한 사람들은 다음 일도 웬만한 실수와 실패 앞에서도 의연하게 다시 서서 갈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