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가장 기쁜 소식 중 한 가지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일 것이다. 광화문 교보문고를 지나다닐 때면 한국의 노벨문학상 작가란을 미리 비워둔 그 패널이 눈에 띄곤 했다. 과연 가능성이 있을까. 언제나 가능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했는데 이제는 꽉 차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하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의 책을 읽었는가. 아니다. 나는 그녀의 시만 만나 보았다. 시 한 편으로도 마음이 미어지게 차 올라오는 그 감정에 잠시 생각과 걸음을 멈추곤 한다.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작가라면 분명 글도 그러하겠지. 나 보다 먼저 책을 읽은 분들의 서평과 줄거리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부분 부분 인용되는 글귀만 보아도 마음이 저려왔다. 그렇기에 더더욱 미루어 둔 것이다. 쉽게 펼칠 수가 없어서.
맨부커 상을 수상한 채식주의자는 아직까지도 용기가 나지 않아 미루어 두고 있다. 다만 소년이 온다는 전부터 지켜보고 있던 책이라 조금 더 마음을 모은 다음 준비가 되었을 때 읽을 예정이었다. 나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책들을 읽을 때면 늘 마음을 다잡는 과정을 가진다. 어느 책이든 쉽게 쓰여지지 않은 법이지만 유독 노벨문학상 수상작들은 읽는 동안, 그리고 읽고 나서 그 후의 감정들을 추스리기가 참으로 힘겨웠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아직도 그 어지러운 나비의 날갯짓과 개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기의 사체가 눈에 그려지는 듯하고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 황폐함과 배신감과 허전함에 여전히 마음이 공허해진다. 사람의 부족함을 넘어서 잔인함과 지독한 외로움과 그럼에도 살아가고자 하는 처절한 용기와 좌절을 마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노벨문학상을 공포하는 그 홈페이지를 클릭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이 글귀였다.
for her intense poetic prose
that confronts historical traumas
and exposes the fragility of human life
단어 하나하나가 신중했다. 그중에서도 intense와 confront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intense는 우리말로 하면 강렬한, 치열한, 열정적인, 격렬한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공식적인 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녀의 강렬한 시적 산문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냅니다."
intense의 영영 사전 정의는 'very great in degree, very strong, done with or showing great energy, enthusiasm, or effort (미리엄 웹스터 학습자 사전)'으로 되어 있다. 유의어로는 passionate, fierce, heated, emotional, violent, fiery, ardent, fervent 등이 있고. 비슷한 intensive는 '집중적인, 집약적인, 철두철미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단순하게 강렬한 이라는 한 마디가 아닌 것이다. 심지어 poetic prose라고 한다. prose는 산문이다. 산문은 아무래도 운문보다는 긴장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poetic, '시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시적인 산문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거기에 intense라는 강렬하면서도 그 안에 치열한 고뇌가 집약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실 intense poetic prose라는 말 하나로도 다 보여준다고 여겨지지만 뒤에 조금 더 부연했다. confront는 '맞서서 싸우는 것'이다. 단순하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해서 나아간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함께 혹은 완전히라는 뜻을 지닌 접두사 con과 앞, 정면, 얼굴을 뜻하는 front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니 '함께 얼굴을 마주 보고 서다'라는 뜻을 지닌 것이다. 즉 외면하고 싶은 어렵거나 난감한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에 맞선다는 뜻이다. 우리는 늘 역사의 아픈 부분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 부끄러운 부분은 넘어가고 싶다. 당연하다.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치부를 꺼내서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어찌 서서 나갈 수 있을까.
마지막은 인간 삶의 연약성이다. fragility는 일상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단어이다. 택배 상자에 보통 fragile이라고 많이 써져 있다. '부서지기 쉬운, 손상되기 쉬운, 섬세한, 약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취급 주의 물품에 많이 써져 있다. 그러니 fragility는 깨지기 쉬운 것, 부서지기 쉽고 약하고 덧없는 그런 연약함을 뜻한다. 우리는 안다. 강인하게 살아가는 듯 보이는 사람이라도 사실은 얼마나 여리고 약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짧은 세 줄의 저 글이 마음을 사로잡아 며칠을 생각했다. 늘 부끄러운 나 자신을 또 생각해 보았다. 그래도 또 그렇게 힘을 내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한강 열풍은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 이미 책은 품절과 품귀 현상을 보인다고 하니, 지금 열심히 읽는 파친코와 원더부터 읽고 나서 쓸쓸하고 호젓한 겨울에 미루어 두었던 그녀의 책을 만나보려고 마음을 조금씩 그러모아 본다.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2024 is awarded to the South Korean author Han Kang, “for her intense poetic prose that confronts historical traumas and exposes the fragility of human life.”
(2024년 노벨문학상은 대한민국의 한강 작가에게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의 사유로" 수여되었습니다.)
In her oeuvre, Han Kang confronts historical traumas and invisible sets of rules and, in each of her works, exposes the fragility of human life. She has a unique awareness of the connections between body and soul, the living and the dead, and in her poetic and experimental style has become an innovator in contemporary prose. (그녀의 모든 작품에서 한강은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들의 집합체에 맞서고, 개개의 작품에서는 인간 삶의 연약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몸과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독특한 연결성을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그녀의 시적이고 실험적인 양식은 현대 산문의 혁신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