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햇살이 어울리는 완연한 봄기운이 느껴지는 그런 날. 3월 첫 주가 시작되는 오늘은 삼일절의 대체공휴일이다. 하루의 여유가 생긴 탓에 조금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올해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진 않았다. 몇 가지 소소한 계획들이 두 달의 겨울방학에 예정되어 있었지만 모두 틀어졌다. 지독하게 아팠던 탓에 낫는데 한 달이 걸렸고 그 후에도 건강은 지지부진하게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다. 제일 최우선으로 수행했던 집안의 책들 솎아내기는 예정했던 양의 3분의 1 정도로만 완성했지만 그만큼만으로도 충분히 벅찼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새해 시작 후 두 달은 유독 느리고 유독 버거운 느낌으로 지났고 어느 사이 새 학년을 맞이해야 하는 봄이 훌쩍 다가와 있었다. 하려던 일들을 차치하고 했었야 했던 일들을 조금 한 것으로 만족하기엔 아쉬웠다. 마지막 주말을 활활 태우기로 했다.
토요일에는 밀린 손빨래를 했다. 셋째가 졸업하면서 입던 야구복을 야구부에 정리해서 주기로 했다. 각자의 유니폼이 있지만 격렬하게 달리고 구르는 아이들의 유니폼은 늘 쉽게 해어지고 찢어지기 일쑤라 여벌 옷은 늘 환영이다. 신입생이 들어오면 유니폼이 나오기까지 시일이 걸려 임시로 입어야 하는 경우에도 유용하다. 하지만 세탁기로만 세탁해 주기엔 흙물의 흔적이 제대로 빠지지 않는 탓에 손빨래가 필수다. 문제는 그 손빨래가 에너지 소모가 생각보다 크고 시간도 생각보다 많이 든다는 것이다. 시간과 품과 힘이 드는 일은 늘 그렇듯 마음의 준비와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때는 당장 하기 쉬운 일부터 시작한다. 설거지를 하고 물받이 청소를 하고 냉장고 정리까지 한 후에야 빨래를 시작했다. 미지근한 물에 불리고 찌든 때 제거 전문 비누로 여러 차례 문지르고 비비기를 반복한다. 한 번에 끝났으면 차암 좋았겠지만 늘 그렇듯 빨래는 세탁기를 돌리는 와중에 계속해서 조금씩 발견된다. 둘째 패딩까지 이틀에 걸쳐서 진행된 손빨래가 끝났다고 만세를 부르는 순간, 또 하나가 당연하게도 발견되어 한숨을 불렀다....
빨래를 하고 팥을 삶고 그래놀라를 만들고 딸기잼까지 만들고 나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고 오니 이미 밤 10시가 넘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만과 편견을 마무리 지어야 하기에 새벽 3시까지 다시 읽으며 정리를 했다. 이상하게도 그런 날, 그런 순간이 있다. 한계까지 몰아치더라도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어지는 그런 때 말이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내일의 계획을 세운다. 책을 두 권 더 읽고 글을 써야 하는데, 그보다는 거실 창 밖의 베란다를 꼭 정리해야겠다고.
아침에 눈을 뜨니 어제의 마음과는 다르게 고민이 된다. 책 읽고 글 쓰고 피아노 치고 싶다. 그래도 읏샤.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향했다. 아까운 생각에 쌓아두었던 공책들, 문제집들을 빼내고 장난감도 정리했다. 오래된 교구들도 과감하게 다 들어낸다. 이제는 타지 않을 것 같은 인라인 스케이트와 용품들은 나눔 하러 따로 두고, 계속 물티슈로 바닥을 닦아 내었다. 먼지가 끝도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맨발로 다녀도 괜찮을 만큼은 되었다. 베란다는 창고가 아닌데, 창고처럼 쓰고 있었다. 심지어 정리된 창고도 아닌, 발을 디디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러워서 문을 열기도 싫고 보기도 싫어 계속 커튼을 치고 살았다. 내일 분리수거하는 날 꺼내면 이제 자유롭게 오갈 수 있고 상쾌한 공기도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되었다.
거실 쪽 베란다를 치웠는데, 정말 문제는 안방 쪽 베란다이다. 자전거 네 대가 차지하고 있는 그 베란다는 온갖 책들과 자잘한 물건들이 훨씬 많다. 혼자서 다 치우기는 무리이니 딱 한 가지만 하기로 했다. 내 만화책 박스를 오픈하는 것이다. 이사 온 지 8년 만에 그 만화책 박스 두 개를 겨우겨우 열었다. 일부는 습기에 차서 종이가 울었고 나머지는 그럭저럭 쓸만한데 계속 소장할지는 고민을 해 봐야겠다. 지금은 구할 수 없는 폐간된 잡지 오후 전 권과 바사라 완전판, 프린세스와 천일야화, 개똥이 이런 책들이 있었다. 박스를 오픈하는 중에 여아용 신발들이 한가득 나왔고 그와 더불어 소꿉놀이, 모래놀이 장난감들도 눈에 들어왔다.
나는 딱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이 만큼 만으로도 마음에 뭉쳐 있던 것이 상당히 해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March라는 3월의 이름답게 딱 맞는 시작이었다. 영어로 3월을 뜻하는 march는 '행진곡, 행진하다' 등의 뜻이 있다. 연주하면서 행진하는 행군악대를 marching band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밀린 숙제인 집 청소를 하면서 씩씩하게 움직이면서 3월을 시작했으니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왜 행진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 march가 3월을 뜻하는 March가 되었을까.
이것은 로마의 달력 그레고리우스 력과 율리우스 력모두에 들어가 있는 이름이다.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 아레스, 즉 마르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동서양을 무론 하고 추운 계절인 겨울은 전쟁을 하기에 바람직하지 않은 시기였다. 그리하여 날이 따뜻해지는 봄이면 움직이기 좋으니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 고대 로마에서 3월은 군대가 움직이는 계절의 시작으로 확정되었다. (In ancient Rome, March marked the start of the military campaign season.) 또한 원래는 이 3월이 한 해의 첫 번째 달이기도 했다. 신의 이름을 딴 다른 달, January, June과 같은 달은 그렇다 쳐도 September, October, November, December은 모두 숫자 7, 8, 9, 10에서 만들어진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의 9월은 당시로서는 7월이었다.
추운 겨울이 한 해의 시작인 것도, 따스해지는 봄이 한 해의 시작인 것도 나는 괜찮다. 추운 겨울은 활동력이 조금 떨어지는 대신, 어떻게 한 해를 보낼지 조금 더 궁리하면서 준비하는 시간이 될 수 있고, 따스한 봄은 본격적으로 계획을 펼쳐나가는 움직임의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공식적으로 세 번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여기곤 했다. 양력 1월 1일의 공식적 시작. 음력 1월 1일의 두 번째 시작. 그리고 세 번째로는 3월 1일로 새 학년 새 학기의 시작이다.
영어로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표현으로 'turn over a new leaf'라는 말이 있다. 무심결에 보면 새로운 잎사귀를 넘기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리에게 leaf는 나뭇잎의 잎사귀로 더 친숙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잎사귀를 넘기는 것이 왜 새로운 시작일까. 3월이 되면 새순이 돋고 새잎이 나서 그럴까 하는 정도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여기서 leaf는 나뭇잎이 아니라 책의 한 페이지를 뜻한다. 16세기에 책의 장, page는 leaf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leaf through는 책장을 휙휙 넘기듯 대강 훑어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새로운 장을 펼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니 turn over a new leaf는 딱 맞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이 되다,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다는 뜻으로도 사용이 된다.
우리는 늘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고 더 바른생활을 하고 더 열심히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항상 게으르지 않고 집을 깨끗하게 정리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이다. 집은 왜 치워도 다시 어지러우며, 닦아도 먼지의 흔적이 가득하며, 왜 나는 항상 시간에 허덕이면서도 느릿느릿 움직이는가. 체력은 바닥인데 의욕만 넘치지 하다가 중도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멈추는 일도 허다하다. 그래도 매일매일 새로운 장이 펼쳐지니까 매일매일 실패해도 매일매일 다잡아 본다. 작심삼일이라도 되면 정말 훌륭하다. 작심일일을 매일매일 반복하면서 일단 만족해 본다. 최소한 오늘 나는 'I turn'ed' over a new leaf.'라고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