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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May 20. 2023

Sorry

The game of sweet revenge

오랜만에 아이들과 '쏘리'라는 게임을 했다. 아프니까 하루 종일 쳐져있는데 내가 정말 싫었다. 건설적으로 놀아주지도 못하고 집안 일도 제대로 못하고 쉬는 것도 아닌 어설프게 주말 하루가 가는 것이 싫었다. 오늘은 일부러 약을 먹지 않아 보았다. 어지럽고 멍한 것이 약기운인가 싶었는데 콧물이 꽉 차서 귀까지 멍멍한 것을 보니 백 퍼센트 약기운에 취한 것은 아닌가 싶고 그냥 아픈 것이 맞았다. 그래도 약을 먹지 않고 일단 버텨보고 오후에는 일부러 밖에 나갔다 왔다. 정말은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고 싶진 않았지만 억지로라도 집과의 분리를 할 필요가 조금은 있었다. 번갈아가면서 네 명의 아이들이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날. 내가 건강할 때는 괜찮았지만 이렇게 심하게 아플 때는 조금 버겁기도 했다.


나가서 별 것을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아이들 먹을 과자를 좀 사고 둘째가 사다 달라는 연고를 좀 사고 조금 걷고 친구랑 대화를 좀 나누었을 뿐인데도 좀 나았다. 잠깐 떨어져 있으면서 충전한 그 기운으로 아이들과 보드게임을 했다. 쏘리라는 게임은 한국에서는 잘 안 하는 게임으로 외국인 친구가 우리 집 아이들에게 가져다주면서 게임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Sorry라는 카드가 나오면 "쏘리!"라고 말하면서 다른 팀의 말을 시작점으로 돌리고 내 말을 그 위치에 가져다 놓아서 빨리 끝낼 수 있다. 문제는 이 쏘리가 랜덤으로 생각보다 자주 나오고 의외의 반전 효과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꼴찌가 1등이 되기도 하고 1등이 뒤로 밀리기도 한다. 부제처럼 정말로 짜릿한 복수의 맛도 볼 수 있는 게임이다.


말은 '쏘리'이지만 실제로는 미안한 마음은 아니고 형식적인 표현일 뿐이라서 여기서 쏘리는 정말 얄미운 단어이다.


승부욕 강한 둘째가 몇 번 쏘리를 먹고는 울먹울먹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1등을 했고 내내 잘 달리던 셋째는 쏘리 카드 몇 번을 받더니 3등으로 떨어져서 눈물을 보였다. '져도 괜찮아'는 아직까지는 아이들에게는 좀 힘겨운 부분이다. 승부욕이 엄청 강한 나이지만 아이들의 눈물을 몇 번 본 다음에는 애매하게 져 주고 있는데 이번 쏘리 게임의 경우는 사실 억지로 져 주기가 좀 힘들었다. 어느 카드가 나올지는 정말로 운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도블게임. 이것도 집중을 요하는 게임인데 오늘은 정말로 집중이 되지 않아서 그 틈을 파고들어 아까 울먹이던 셋째가 1등을, 둘째가 2등을 가져갔다. "아니 엄마가 아픈 틈을 타서 다 가져가다니!!!"라고 과장되게 말하자 아이들은 모두들 키득키득 웃었다. 아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엄마가 적당히 져주고 있다는 사실을. 비슷하거나 동일한 선상에 서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이기려고 하고 이기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반면에 큰 차이를 두고 앞서 있는 사람의 경우는 그냥 져 주어도 괜찮다. 어차피 내가 못해서 (실제로는 가끔 그렇기도 하지만!!) 지는 것이 아닌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담처럼 "맘! 아임 쏘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도 참 좋은 일이다. 무엇이든지 받아주는 대상이 있고 항상 나를 안아주는 엄마가 그 사람이라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우리 엄마를 좋아하지만 항상 엄마가 어려워서 그렇게 표현할 수 없었다. - 이것은 나중에 따로 써야 할 긴긴 이야기.)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아이들에게 적당히 져 주는 것처럼 나에게도 적당히 져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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