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연재소설

by 미아






2장. 재회





서울 강남의 고층 빌딩, 미아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손대는 사업마다 운이 좋게도 성공해 급성장하고 있다. 그 결과로 얼마 전 사옥을 건축해 강남 신사옥으로 이전했다. 오늘 중요한 미팅이 있는 회의실은 유리창 너머로 도심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시티뷰가 멋진 곳이었다. 미아가 서 있는 발아래로는 끝없이 이어진 대로변에 빽빽이 들어선 빌딩들이 한눈에 들어왔고, 자동차들은 개미 떼처럼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삼성동의 한 대형 옥외 건물 전면을 덮고 있는 거대한 3D 아나몰픽 광고 화면에는 최신 기술을 활용한 입체적인 이미지가 마치 건물 밖으로 튀어나올 듯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광고 속 스포츠카가 도로를 가로지르듯 화면을 벗어나 질주하는 듯했고, 초대형 스마트폰 화면에서는 화려한 영상이 파도처럼 흘러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감탄하며 고개를 쳐들고 홀린 듯 이미지를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멀리 보이는 한강의 반짝이는 수면이 도심의 바쁜 에너지를 차분히 감싸주는 듯했다. 지평선 너머로는 부지런히 개발 중인 건물들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위로 펼쳐진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가벼운 흰 구름이 부드럽게 떠다니며 태양 빛을 받아 은은한 광채를 뿜어냈다. 햇살은 유리창을 타고 부드럽게 스며들며 회의실 안을 따뜻한 분위기로 감쌌고, 주변 빌딩들은 이곳이 거대한 경제 중심지임을 증명하듯 유리창에 반사된 빛들이 반짝이며 서로의 존재를 비춰주고 있었다. 공기마저 상쾌해 보이는 듯한 오후, 강렬하지만, 부드러운 햇살이 바쁜 도심 속에서도 한 줄기 여유를 선사하는 듯했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아름답게 펼쳐진 풍경과 달리 회의실 안에 있는 미아의 심경은 복잡했다.

중요한 투자 미팅이 예정된 날, 그녀는 긴장한 채 밤새 검토한 자료를 다시 한번 훑어보고 있었다. 마침 문이 열리며 들어온 인물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태오 강. 그날 그 사람이 아닌가.' 그는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오며 참석자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순간 자료를 넘기던 미아의 손이 얼어붙었다.


태오의 헤어스타일은 단정하게 변해있었고, 매끈한 다크 네이비 컬러의 맞춤 슈트를 입고 있었다. 날이 선 깔끔한 셔츠와 은은한 은빛 넥타이가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손목에 가는 플래티넘 시계가 빛났고, 발끝까지 반듯하게 정리된 반짝이는 구두가 그의 단정한 성격을 보여주듯 했다. 그의 단단한 어깨가 강조되면서 다리가 더 길어 보였다. 그가 걸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기품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눈길 한 번 주는 것조차 신중한 듯 보였고, 말투는 마치 감정을 배제한 기계적인 듯했다. 그는 불필요한 미소를 짓지도 않았고, 어조 또한 변화 없이 일정하며 단호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했지만, 그 안에는 계산된 거리감이 있었다.


미아는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 이 기획이 실패하면 이제껏 쌓아온 그녀의 위치에도 큰 손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 역시 미팅 스케줄이 잡힌 날부터 더 고심하며 신경 써서 준비한 옷차림이었다. 화이트 실크 블라우스와 미디 길이의 슬림한 네이비 스커트, 그리고 미들 굽의 샤넬 베이지 펌프스. 너무 딱딱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전문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려 했다. 단정하게 묶은 낮은 포니테일에서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렸지만, 너무 차가운 이미지를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신경 쓰지 않았다.


“어, 여기서 또 보네요.” 태오가 무심한 듯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맴돌았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그러나 미아는 그 눈빛 속에서 미묘한 흔들림을 포착했다. 단단한 외면과는 달리, 그의 시선은 어딘가 모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한 것처럼 보였지만, 미아는 어쩐지 그 무심한 차가움이 더욱 신경 쓰였다.

“네. 이번에는 비즈니스네요.” 미아가 짧게 대답했다.

태오 역시 속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녀를 회의실에서 다시 만난 순간부터 미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강한 논리와 냉철한 판단으로 무장한 자신에게, 미아는 감정의 균열을 만들어내는 존재였다. 그녀가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갈 때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박 이사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강 대표님과 미아 씨, 혹시 아는 사이신가요?”

태오는 짧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마저도 감정을 싣지 않은 가벼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미아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자료를 펼쳤다. “다 오신 것 같으니, 그럼 오늘 미팅을 시작하겠습니다.” 미아는 준비한 내용을 유창하게 풀어나갔다. 태오는 브리핑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태오 강은 글로벌 투자회사 KJS 캐피털의 대표로,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라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실력자였다. 그는 기업 가치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단칼에 쳐내는 결정을 내리는 냉철한 투자자였다.

그의 주된 업무는 신생 기업이나 기존의 기업들과 협업하여 성장 가능성을 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과거 뉴욕 월가에서 경력을 쌓았고, 그 경력을 증명하듯 젊은 나이에 비해 풍부한 인맥과, 빈틈없는 판단력과 결단력으로 빠르게 업계를 장악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 그는 한국 시장에서도 공격적인 투자 전략을 펼치며 업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번 미팅도 그러한 그의 투자 스타일을 반영하는 자리였다. 그는 미아의 회사, EYX 테크의 신사업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였지만, 동시에 허점을 예리하게 짚어냈다.

“미래가치는 우수하지만, 현재 프로젝트의 시장분석 자료가 부족합니다. 이런 미흡한 데이터로는 투자 결정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미아는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여러 날 공들인 작업이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상대방을 경멸하는 말투가 신경 쓰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단정적인 어조, 마치 상대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기대했던 것보다 준비가 부족해서 실망입니다.” 태오가 덧붙였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날카로운 얼음조각처럼 냉정하게 울려 퍼졌다.


미아는 EYX 테크의 신사업부 기획팀 팀장으로, 스타트업이지만 눈부시게 급성장하고 있는 IT 기업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었다. 그녀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철저한 분석으로 신사업을 구상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케팅 설계 및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하지만 태오 앞에서는 자신의 프로젝트가 여러모로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솔직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라면, 그런 말보다 현실적이고 건설적인 피드백을 주셨으면 좋겠네요.”

태오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를 감추려 무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그는 업무적인 것보다는 미아에게 더 다가가고 싶었다. 일과 관련된 것은 얼마든 다른 방법으로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녀에게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는 감정을 숨기는 방식으로 자신을 방어했다. 그럴수록 그의 태도는 더 냉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근데, 왜 이렇게 자꾸 신경이 쓰는 거지?’


태오는 애써 생각을 정리하며 다시 진지해지려 애를 썼다.

그럴수록 회의 내내 태오의 태도는 더욱 무표정하고 냉정해졌다. 그의 날카로운 질문들이 이어졌고, 미아는 그를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가 던지는 질문들은 핵심을 찌르며 팀원들의 준비 상태를 시험하는 듯했다.

김 과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강 대표님, 현재 시장 조사는 지난 분기 자료를 기준으로 했지만, 이번 달의 변동 사항을 반영한 업데이트 버전도 준비 중입니다.”

태오가 냉정하게 답했다. “업데이트 버전이 있으면 지금 당장 공유하는 게 낫겠군요. 의사 결정에 필요한 정보니까요.”

한숨을 내쉰 박 이사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 애썼다. “서로 협력하며 보완할 부분을 찾아보면 좋겠죠. 강 대표님께서도 기대하시는 방향이 있을 테니 함께 맞춰보면 좋겠습니다.”

태오는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시간이 없으니, 앞으로 좀 더 완벽하고 구체적인 자료와 방향성을 기대하겠습니다.”

미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회의는 단순한 업무 미팅이 아니라, 그의 태도를 다시금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는 여전히 오만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녀를 더 신경 쓰이게 했다.

그러나 태오는 회의 내내 그녀의 모습이, 표정이, 눈빛이,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미팅을 마치고, 그는 회의실을 빠르게 나서며 문득 미아를 다시 흘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당당했지만, 조금 전까지의 업무적인 압박감을 애써 감추고 있는 듯 보였다. 그의 마음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이 여자는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래서 더 신경 쓰이는 건가…?, 그녀의 무엇이 이토록 나를 흔드는 걸까?'

그는 미아를 향한 감정을 애써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가 점점 더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미팅이 끝난 후, 미아는 팀원들과 함께 회의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태오가 조용히 다가왔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미아는 놀란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복도 끝의 작은 라운지 공간으로 이동했다.

“방금 회의에서 너무 날카롭게 굴었던 것 같네요.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중요한 투자 결정이라서 조금 더 완전한 방향을 원했던 것 같네요.”

미아는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았다. “네, 알아요. 완벽주의인 거요, 하지만 저희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투자자라고 해서 모든 걸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는 좀 불쾌하네요.”

태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런 의도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좀 더 서로 존중하는 방식으로 의견을 나누면 좋겠네요.”

태오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알겠습니다. 불편하셨다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녀에게 끌리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듯했다.

미아 역시 복잡한 감정을 안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오만하고 냉정했다.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알 수 없는 감정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미아는 태연한 듯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대표님 말씀처럼, 큰 프로젝트가 걸린 냉혹한 비즈니스 자리였으니까요. 개인감정을 섞을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차갑게 몰아붙이는 태도에 적잖이 당황한 건 사실이에요.”

태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랬군요, 하지만 일시적인 감정과 객관적인 판단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미아는 시선을 고정한 채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객관적인 판단이라면, 비즈니스가 아닌 개인적인 감정이 섞이지 않도록 서로 조심하는 게 먼저겠네요.”

태오는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개인적인 감정이요? 미아 씨야말로 너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은데요?”

미아는 애써 미소를 유지한 채 시선을 창밖 풍경으로 옮긴다. “그런가요? 저는 단지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뿐인데요. 대표님이 감정을 너무 배제하려다 차가운 이미지가 강조돼 보이는 건 아닐까요?”

태오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차가운 게 아니라, 효율적인 겁니다. 감정이 개입되면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 없으니까요.”

미아는 팔짱을 끼며 가볍게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며 태오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렇게 차갑기만 하면, 결국 어느 부분에서는 후회할 날이 오지 않을까요?”

태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이 단순한 업무적인 조언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비즈니스에서 후회란 없습니다. 오직 결과만 있을 뿐이죠.”

미아는 가는 한숨을 쉬며 태오를 바라본다. “뭐든 가장 좋은 방법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각자의 생각이 다 다르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최대한 완벽하게 준비해 오겠습니다. 다음 회의에서는 오직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올 수 있도록 만들어 보겠습니다.”

태오는 뭐라 대답할지 몰라 망설인다.

'날 배려하는 듯하면서 이 자신감 있는 태도는 뭘까?' 그들은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태오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미아의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보다 더 복잡한 감정이 태오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앞으로 미아를 다시 보게 될 일이 적잖을 텐데.... 얼마나 더 내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가?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음을 이미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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