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서울의 한옥이 모여 있는 삼청동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어깨를 나란히 두고 이어진 기와지붕이 고즈넉하다. 그 위로 연보랏빛 저녁노을이 아득히 내려앉고 있었다. 오래된 기와집들 사이로 좁디좁은 골목길이 갈래갈래 이어져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비좁은 골목 사이로 은은한 등불이 따뜻한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세련된 카페와 전통찻집이 공존하는 이 동네는 현대와 전통이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미아는 부모님과 자주 찾던 한정식집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고풍스러운 한정식집 나무 창살 사이로 흐린 불빛이 흘러나왔다. 잠시 망설이다 겨우 안으로 들어서자, 차가운 나무 바닥이 안내받은 방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어디선가 레몬 향이 공기 중에 나방처럼 떠다녔다. 드문드문 놓여있는 도자기 장식품과 경계를 표시한 듯한 오래된 병풍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오늘 모임은 아버지 사업과 관련된 중요한 자리라고 얼핏 들었다. 어머니는 몇 번이나 그녀에게 단정한 모습을 강조했다. 사실 오늘 식사 자리는 단순한 가족 모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부담감이 밀려왔다. 미아의 아버지는 최근 사업 확장을 위해 신뢰할 만한 파트너를 찾고 있었고, 태오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업계에서 인정받는 능력 있는 사업가였고, 그와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태오는 금융 및 무역 사업에서 빠르게 입지를 넓혀가고 있었고, 아버지는 그의 사업 감각과 전략적 사고를 높이 평가했다.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를 넘어 보다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이번 저녁 모임은 서로 신뢰를 쌓는 한편, 사업적으로도 더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너무 심각한 얼굴 할 필요 없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가 미아의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속삭였다.
“이런 자리 불편하다고 했잖아요.”
“네 이미지가 가족 전체의 인상을 좌우하는 거 알지.” 어머니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오늘 드레스 코드 맘에 든다.” 연노란색 원피스에 콩알 진주 귀걸이를 한 그녀의 모습은 몇 살은 더 어려 보였다. 미아는 마지못해 허리를 펴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연습을 했다. 하지만, 이 자리가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가족과 몇몇 지인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 그녀가 예상치 못한 사람이 있었다. 태오 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미아의 눈이 순간 커졌다. 태오 역시 당황한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설마…’ 미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아버지가 말하던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태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비즈니스 만남이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정작 자리에서 마주친 사람은 뜻밖의 인물 미아를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의 시선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차분함을 되찾았다. 미아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지정 좌석을 안 내받았다.
“미아, 어서 와라.” 아버지가 밝은 미소로 손짓했다.
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어머니가 태오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강 대표님, 어쩜, 우리 한 자리에서 이렇게 보게 되니 무척 영광이네요. 요즘 바쁘시죠?”
태오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미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가 평소보다 더 호들갑스레 태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신경 쓰였다.
식사가 시작되자 테이블 위에는 마치 오랜 비법을 담고 있는 듯 정성이 깃든 한정식 요리들이 정갈하게 놓였다. 가운데 구절판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주위를 감싸듯이 가지런히 놓인 떡갈비와 불고기가 연이어 나왔다. 방금 구운 김이 자개처럼 반짝거리고, 향긋한 냄새를 품은 송이버섯구이도 나오고, 하얀 백자 그릇 속 갓 담근 나박김치는 선홍빛 국물이 은은하게 빛나며 살짝 흔들릴 때마다 얇게 썬 무 조각이 국물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잡채는 알록달록한 채소와 함께 가느다란 면발이 탱탱하게 엉켜 있었고, 갓 지은 돌솥밥은 하얀 김을 내뿜으며 고슬고슬한 모습을 자랑했다. 깜찍한 뚝배기 안의 된장찌개에서는 구수한 냄새가 피어올랐고, 작은 기포가 보글보글 터지며 숨겨진 조개와 흰 두부와 호박 조각을 드러냈다. 한우 육회는 고운 선홍색을 자랑하며 접시 위에서 빛났고, 노란 달걀노른자가 가운데에 앉아 촉촉한 육질이 더욱 부드럽게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옆의 전복구이는 버터와 간장의 깊은 향을 머금고 탱탱한 속살을 살짝 드러낸 채로 수줍게 터질 듯한 살결을 자랑했다. 고소한 참기름 향이 감도는 나물 반찬들이 작은 접시에 골고루 곱게 담겨 있었고, 알이 꽉 찬 간장게장은 단단한 게딱지 사이로 윤기가 도는 짭조름한 간장이 스며들어 있었다. 두부조림은 마치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연해 보였고, 노릇노릇하게 부친 전들은 바삭한 가장자리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들 사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돌솥밥과 갓 부친 전의 고소한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졌다.
음식이 나올 때마다 생활 한복을 차려입은 도우미 이모는 정성스러운 설명을 곁들였다. “이건 오늘 아침 갓 담근 나박김치입니다. 시원한 맛이 일품입니다.” 따뜻한 물이 담긴 작은 찻잔에서 은은한 향이 피어올랐다.
어머니는 태오에게 유독 관심을 보이며,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강 대표님, 우리 미아 몇 번 본 적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들 성실하다고 그러더라고요.”
미아는 숟가락을 들다가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엄마,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왜 하세요.”
어머니는 손을 흔들며 웃었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우리 미아랑 일하면서 불편한 점은 없으셨나 해서요?”
태오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업무적으로는 매우 유능한 분입니다.”
그는 말없이 미아의 접시를 힐끗 보았다. 그녀가 반찬을 건드리지 않고 있는 것을 눈치채곤, 자연스럽게 자기 앞에 놓인 노릇한 조기구이를 그녀 쪽으로 슬며시 밀어 놓았다. “좋아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미아는 순간 멈칫하며 태오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표정 없이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불편한 저녁 식사 자리가 끝나고 간단한 담소를 나누는 동안, 미아는 밖으로 빠져나와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미아는 자신도 모르게 또 한숨을 내쉬었다. 어둑어둑한 삼청동의 골목길은 낮보다 더 운치 있는 분위기를 내뿜었다.
순간, 가까이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저녁 식사, 부담스러웠죠?”
태오였다.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솔직히, 좀, 그렇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다가왔다.
“익숙한 분위기가 아니라, 저도 이런 자리가 여전히 부담스럽습니다.”
'이 남자에게 이런 솔직함도 있었나?'
그 순간, 미아는 아주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를 조금 다르게 보게 되었다.
삼청동의 밤은 고요하면서도 운치가 있었다. 길가에는 부드러운 노란 등불이 드문드문 걸려 있었고, 한지 창문살 밖으로 비치는 연한 불빛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골목 끝자락 전통찻집에서 정겨운 가야금 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와지붕 위로 달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았고, 돌담 너머로 솔솔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서늘하면서도 기분 좋았다.
태오는 그런 풍경 속에서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의 큰 키와 넓은 어깨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듬직하게 보였고, 차분한 표정 속에서도 어딘가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의 어깨너머로 희미한 빛이 비쳐 더욱 선명하게 각인되는 얼굴선이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미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지금껏 알던 차갑고 철저한 사업가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태오는 이 조용한 밤과 이상하리만큼 잘 어울렸다.
바람이 살짝 불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뜨리자, 태오가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리지 않도록 살짝 젖혀주었다.
태오는 여전히 무심하고 말없이 서 있었다. 달빛이 그의 눈동자에 부딪쳐 부드러운 빛을 더했다.
미아는 왠지 모르게, 그와 이 순간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요?" 태오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진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태오 또한 한결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미아가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깊고 차분한 눈동자가, 오늘따라 이전과는 다른 미지의 무언가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아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다가, 그제야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아무튼, 고마워요.” 그녀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주변의 소리 속에서도 분명하게 들렸다.
태오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런 모임, 앞으로도 있겠죠?" 그가 문득 말을 꺼냈다.
미아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요."
태오는 잠시 생각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도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은데요."
미아는 살짝 눈썹을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요?"
"음, 그냥… 생각보다 이런 밤이 괜찮다고요."
미아는 그의 말을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이런 밤 풍경? 아니면… 식사 모임요?"
태오는 다시 그녀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깊어졌다.
“둘 다요.”
태오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며 애써 미소를 지웠다.
늘 강단 있고 자기주장이 뚜렷했던 미아. 때때로 의견이 부딪칠 때면 거침없이 반박하고, 단호하게 선을 긋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달빛 아래 서서 무심히 바람을 맞고 있었다. 평소처럼 당당하고 논리적인 모습이 아니라, 어딘가 고요하고 평온해 보였다. 자신과는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던 사람. 그런데 지금은 이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런 미아를 보는 것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오늘 저녁, 뜻밖의 장소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원하지 않은 자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우연이었을까. 몇 번이고 서로를 불편해했던 사이였는데, 오늘따라 그녀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자꾸 더 시선을 끌었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동하는 그녀를 보고 무심결에 반찬 접시를 밀어주었을 때, 그녀가 놀라듯 그를 바라본 순간도 기억났다. 무심코 한 행동이었는데,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다른 세계에 속해있을 것만 같은 미아는 여느 때보다도 더 가까이 와 그 앞에 서 있다.
가을밤의 선선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뜨려놓았을 때, 태오는 마치 여동생을 대하 듯, 거의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작은 머리카락 한 올이 그녀의 얼굴을 가리는 것이 이상하게 거슬렸고, 자연스럽게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그녀가 그 순간 놀란 듯이 숨을 살짝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태오는 알아챘다.
이제 그녀가 더 이상 스쳐 지나가는 사람, 단순히 매번 의견이 달라 충돌하는 사람, 피곤하게 신경 쓰이는 존재로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삼청동의 밤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고, 그 고요함 속에서, 미아의 존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태오의 마음속에 저 끝 어디선가 설명할 수 없는 떨림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늘 자신만만하고 무심한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태오를 보며, 미아는 그의 작은 배려 하나하나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오늘 식사 자리에서 그가 건넨 먹기 좋게 발라진 조기구이, 그리고 손에 닿을 수 있도록 끌어다 놓은 반찬 접시들. 이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처음엔 그저 몸에 밴 형식적이고 매너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소 자신을 철저한 비즈니스로만 대하던 그가, 그녀가 반찬을 거의 손대지 않은 걸 알아채고 아무렇지 않게 접시를 밀어줬을 때, 미아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가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은근히 사람들을 배려하는 세심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배려가 자신을 향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바람에 흩날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듯한 손길. 마치 이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너무 자연스러워서 거부할 틈도 없었다. 그의 손끝이 스치고 난 뒤, 그녀는 자신이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는 걸 깨달았다. 순간적인 떨림. 그리고 어쩐지 낯설지 않은 따뜻함. 이전에 그와 부딪칠 때마다 짜증 섞인 감정이 먼저 올라왔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왜 이렇게 자꾸 신경이 쓰이지? 도대체 이 감정은 뭘까?’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와는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냉정하고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태오 모습은 어쩐지 달라 보였다.
그는 가을밤의 선선한 공기 속에서 한결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부드러움이 그녀를 잡고 어디론가로 이끌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가벼움이나 무모함 같은 것은 없어 보였다.
타인에 대한 단순한 배려라고만 생각했던 행동들이, 어쩌면 그 이상의 의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아니, 그녀가 달빛에 취해 몹시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생각의 가지들이 뻗어나가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미아의 마음도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미아는 걷고 싶었다. 무작정 어디론가를 향해 그저 걷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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