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화려한 강남의 삼성동과 고즈넉한 종로의 삼청동, 이 두 곳은 마치 태오와 미아의 모습처럼 서로 상반된 세계를 보여준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과 수많은 자동차들, 그 주변에 고층 빌딩들이 빽빽이 자리 잡고 있는 삼성동에서 빌딩 사이를 바삐 오가는 사람들은 늘 시간에 쫓기는 듯 보인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퇴근한 늦은 밤이 되어서야 여전히 화려한 불빛이 수 놓여 있는 빌딩숲 사이에 적막이 찾아온다.
그와 달리, 미아에게는 여전히 전통적인 분위기를 간직한 채 남아있는 삼청동이 더 정이갔다. 전통과 현대가 조용히 맞닿아 시간이 잠시 멈춘 듯 느리게 흘러가는 그곳에서 잠시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어서 좋았다.
태오의 회사 본사 건물은 서울 강남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유리로 된 외벽은 햇빛을 찬란하게 반사하며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 있다. 유명한 건축가가 최첨단 건축 기술로 설계한 이 빌딩은 날렵한 곡선과 견고한 구조가 조화를 이루며 현대적인 세련미를 극대화하여 방문하는 이들의 감탄을 늘 불러일으킨다.
미아는 오전 일정을 바쁘게 마무리하고, 태오가 근무하는 본사 건물로 달려왔다. 강남의 화려한 빌딩 숲 한가운데 뽐내듯 의기양양하게 우뚝 선 건물 앞에 멈춰 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리 건물의 거대한 외벽은 마치 그녀를 비추는 거울처럼 서 있었고, 도시의 햇살을 받아 도도하게 반짝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건물 높이에 현기증이 났다. 오늘 그녀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논의하기 위해 태오를 만나러 왔다. 하지만 건물 앞에 서자마자 자신이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금빛 테두리의 자동문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를 서서히 이 낯선 세계로 초대하는 것 같았다.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광활한 공간이 미아를 압도했다.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그리고 능숙한 걸음걸이로 바삐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녀는 높은 굽의 구두가 신경 쓰여 걸음을 조심스레 내디뎠다. 이곳은 태오가 늘 숨 가쁘게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너무 낯설고 차가운 곳이었다.
건물 입구로 들어서자 대리석 바닥이 거울처럼 반짝여 미아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내고 있었다. 로비 정가운데에는 벽을 가득 채운 대형 미술 작품이 걸려 있고, 천정의 수십 개의 화려한 조명들은 이 넓은 공간을 모조리 비추려고 안간힘 쓰는 것처럼 보였다. 로비 오른쪽에는 고급 카페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라운지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각국의 VIP 고객들을 응대하기 위한 프라이빗 미팅룸이 마련되어 있었다. 미아는 안내데스크에서 출입증을 받아 마치 이 회사 직원인양 자동화된 출입 시스템을 지났다. 정 가운데 위치한 전용 엘리베이터로 재빠르게 걸어갔다. 회사의 주요 부서가 있는 고층부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지정 엘리베이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문이 닫히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태오가 근무하는 사무실 구조는 오픈 스페이스로 되어있었다. 탁 트인 창문을 통해 강남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공간은 모던하고 깔끔한 흑백 톤으로 정리되어 있었으며, 곳곳에 디자이너 가구와 미니멀한 인테리어 소품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직원들의 책상 위에는 최신형 노트북과 스마트 기기들이 놓여 있었고, 업무를 효율적으로 돕는 AI 비서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어 마치 미래의 최첨단 오피스 공간을 연상케 했다.
한쪽 벽면에는 미팅룸이 여러 개 자리하고 있었는데, 유리벽으로 된 공간에서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회의하는 모습이 보였다. 실리콘밸리를 연상시키는 스마트 보드와 최신식 디지털 장비들이 업무의 속도를 더욱 높이고 있었다. 조용하지만 긴장감이 흐르는 공간, 이곳에서는 오직 실력과 성과만이 중요해 보였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다. 손에서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놓지 못한 채, 업무 메일을 확인하고,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체크하며, 끊임없는 미팅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강남의 속도감에 익숙해진 이들은 어느새 이 화려하고도 숨 가쁜 환경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얼마 전, 그녀는 자신의 회사와 태오의 회사가 협업하는 프로젝트의 기획자로 선정되었다. 원래는 총괄담당자가 따로 있었지만, 예기치 않은 사정으로 그녀가 그 책임까지 떠맡게 되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 투자자가 바로 태오였다.
'일정 조정이 가능하시면 연락부탁 드립니다.'
어제 태오에게서 온 갑작스러운 문자 메시지에 그녀는 긴장된 마음으로 시간을 끼워 맞췄다.
미아는 숄더백에 달린 고양이인형 키링을 만지작거리며 초조한 마음을 달래 보았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괜찮아, 할 수 있어, " 그녀는 속으로 자신을 다독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태오가 이미 회의실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미아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태오는 시계를 한 번 흘긋 보고는 문을 열어 그녀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미아는 태오의 안내를 따라 조용히 회의실로 들어섰다.
넓은 공간 한가운데 커다란 테이블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스마트 보드가 설치되어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미아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오롯이 태오의 표정에만 쏠려 있었다.
그는 말쑥한 슈트를 입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류를 검토하는 그의 손끝조차 빈틈없어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 차분한 목소리가 거슬렸다. 그는 늘 거리감을 유지하며 프로페셔널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미아는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정말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머물다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미아는 준비해 온 자료와 노트북을 꺼내며 태오를 바라봤다.
“이 프로젝트, 솔직히 부담돼요.” 미아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도 오늘 미아 씨 의견을 좀 듣고 싶었어요.”
태오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 의견이 도움이 될까요?” 그녀가 살짝 긴장한 듯 웃으며 되물었다.
“미아 씨가 생각보다 정확한 분석을 해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태오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말속엔 진심이 묻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 톤은 변화 없었지만, 그 안에 부드러운 온기가 섞여 있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래도 깊은 눈빛 속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미아는 순간 놀란 듯 태오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그렇게 평가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긴장이 조금 풀린 듯 그녀는 다시 노트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긴장한 듯 노트북을 열자, 태오가 그녀의 손을 흘끗 보았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천천히 해요.”
그 말 한마디가 이상하리만큼 다정하게 들렸다. 마치 미아가 이곳에서 겪고 있는 모든 부담과 긴장을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미아는 태오의 말에 순간 마음이 조금 놓이는 듯했다. 그의 태도는 언제나 차가운 듯했지만, 그 안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온기는 그녀가 위태로울 때마다 보이지 않게 그녀를 감싸주고 있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그녀는 한층 편안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태오는 미묘하게 미소를 지을 듯 말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 잘해봅시다.”
그의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그녀를 향한 믿음과 배려와 무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려 하면서도, 미아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그만의 매너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여전히 약간의 떨림이 있었만, 조금 더 편안해진 듯 보였다.
회의가 끝난 후, 태오의 안내를 받아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고층 빌딩 탑층에 자리한 그의 사무실은 마치 또 하나의 다른 세계 같았다. 커다란 문이 열리자, 널찍한 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검은색과 흰색이 체스판처럼 펼쳐진 대리석 바닥과 세련된 가구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사방으로 둘러진 통유리 창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담담하게 품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회색과 블랙 톤은 절제미가 느껴졌다. 책상 위에는 불필요한 것이 하나 없이 말끔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정돈된 공간은 태오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했다.
태오는 자연스럽게 미아를 창가 쪽 편안한 소파가 놓인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차분한 색감의 패브릭 소파와 유리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정성스러운 차 세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편한 곳에 앉으세요."
태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아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도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 구름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태오는 조용히 차를 따르며 물었다.
"어때요? 여기 맘에 들어요?"
미아는 찻잔을 손에 쥐며 살짝 웃었다.
"아니요, 좀 낯설죠. 여긴, 너무 반듯하고 정돈된 느낌이에요. 마치 딱 정해진 틀 안에서만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태오는 그녀의 말을 듣고 가만히 웃었다.
"그럴 수도 있죠. 여기선 흐트러짐을 허용하지 않으니까요. 모든 게 정확해야 하고, 효율적이어야 하죠."
미아는 찻잔을 살며시 흔들며 말했다.
"저는 삼청동 같은 곳이 더 좋아요. 거긴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 들어요. 거리에는 오래된 낮은 담장이 있고, 저마다 개성 가득한 카페를 둘러보는 것도 좋고, 주인이 직접 손으로 내린 향기 가득한 진한 커피도 마실 수 있죠. 사람들도 조금 더 여유롭고, 바쁜 와중에도 서로 눈을 마주치면 미소를 띠곤 하죠."
태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겠네요. 미아 씨가 좋아할 만한 곳 같아요."
“저는 오히려 삼청동 같은 곳이 더 어색해요.” 태오가 솔직하게 말했다.
“너무 고즈넉해서 가끔은 외로운 기분이 들더라고요.”
미아는 그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순간, 그가 자신과는 너무 다른 세상에서 살아왔음을 알았다.
미아와 태오는 정반대의 삶 속에 있었던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모르게 멀게 느껴졌다.
미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태오를 바라보았다.
"태오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태오는 잠시 생각하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기선 길게 생각할 시간이 없어요.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고, 다음 목표를 향해 가야 하죠. 멈추면 도태되는 곳이에요.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에요. 익숙하니까."
그의 말에서 미아는 태오가 이곳에서 지내온 시간을 고스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세계에서 누구보다 잘 적응했고,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놓친 것은 없었을까?' 미아는 그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미아가 살짝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가끔은 천천히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너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놓치는 것도 많잖아요."
태오는 미아의 말을 듣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아는 그의 반응이 신기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평소에 목적 없이 시간을 보내는 거, 이를테면 산책 같은 건 안 하세요?”
태오는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가끔은 걷죠. 출근길에도, 점심 식사를 나갈 때도, 퇴근길에도. 하지만 목적 없이 걷는 건 익숙하지 않아요.
대부분은 일을 하면서 이동하거나, 생각을 정리하려고 걸을 때가 있죠.”
미아가 기대한 대답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의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럼, 삼청동 같은 곳이 답답할 수도 있겠네요?”
태오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하지만 요즘은 그렇게 느리게 흐르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미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태오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것들 속에서는 내 시간이 없거든요.
그래서, 가끔은 미아 씨가 말대로 산책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요.
의도적으로 그런 시간을 만들 필요성을 느끼죠. ”
미아는 깊이 공감하며 말했다.
“그냥 걷는 게 아니라, 주변을 온전히 느껴보는 거예요. 거리마다 색다른 냄새가 나고, 계절마다 다른 바람이 불어요. 벽돌 틈에 핀 작은 꽃도 보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눈에 들어오죠. 그렇게 걷다 보면 복잡했던 생각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는 마법 같은 경험을 하실 수도 있겠죠.”
미아가 덧붙여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일에 열중하다 보면... 그렇게 멈추는 게 쉽지 않아요."
태오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의 깊은 눈빛에서 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미아는 태오가 자신과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문득 태오의 모습에서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는 또 다른 감정이 올라오는 것이 엿보였다.
"저만 알고 싶은 핸드드립 커피 잘하는 카페를 알고 있는데... 같이 가 보실래요?, 어때요?"
미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태오는 찻잔을 들어 올리다 잠시 머뭇거린다.
"언젠가..."
그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미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미가 그 짧은 말속에 담겨 있음을 알았다. 어쩌면, 그녀가 바라는 희망이 그녀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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