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거리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반짝이는 조명과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미아의 마음은 여전히 꽁꽁 얼어붙은 채였다. 서울 시청 앞 광장은 거대한 트리와 수천 개의 전구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커다란 유리구슬처럼 반짝이는 조명들이 거리의 나뭇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사람들은 기억을 붙잡아 두려는 듯 연신 카메라를 켜고 웃음을 터뜨렸다.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서는 익숙한 캐럴이 흘러나왔고, 연인들은 따뜻한 커피를 손에 쥔 채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설렘의 계절이고, 누군가에겐 사랑의 계절이었고, 또 누군가에겐 기다림의 계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아의 마음은 그런 따스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태오와 이별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무뎌질 줄 알았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믿었다. 태오가 없는 일상도 익숙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미아에겐 그 시간이 하나하나 또렷한 조각처럼 박혀만 갔다. 아무리 바쁘게 지내려 해도, 아무리 그를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그의 빈자리는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그와 나눴던 말들, 함께 웃었던 장소, 손끝에 닿던 체온 같은 사소한 것들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움이 아니라, 마치 아직 사랑이 남아 있는 것처럼, 정리된 줄 알았던 마음이 다시 물결치듯 밀려오곤 했다.
미아는 발길을 돌려 신촌으로 향했다. 언젠가 태오와 함께 걸었던 거리,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오후, 크리스마스를 앞둔 신촌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알록달록 불빛 아래에서 캐럴이 흘러나오고, 붉은 코트를 입고 쇼핑백을 든 엄마와 작은 딸아이는 손을 잡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미아를 스쳐 지나쳤다. 하지만 미아는 그런 소란 속에서도, 오히려 고요함을 느꼈다. 마치 세상과 유리 벽 하나를 두고 떨어져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고요했다.
미아는 오랜만에 대학 시절 자주 가던 서점을 찾았다. 대형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의 추위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따뜻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서점 내부는 크고 넓었다. 따뜻한 조명 아래 익숙한 책 냄새가 가득한 그곳은 왠지 모르게 미아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아 좋았다. 미아는 마음이 복잡할 때면 늘 이곳에 와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익숙한 공간이었다. 천장까지 이어진 책장들, 부드러운 조명, 조용히 흐르는 재즈 음악. 책을 고르는 사람들 틈에서 미아는 자신이 투명한 물체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태오와 함께 이곳을 천천히 걸으며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이야기 나눴던 기억이 떠올랐다. 서로에게 책을 추천해 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오늘은 홀로 그 책장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활자보다 현실을 더 믿는 사람이었지만, 미아가 좋아하는 구절을 읽을 때만큼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책장 사이를 걷다가 문득 미아의 시선이 멈췄다. 예전에 함께 읽었던 그 책,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책장을 천천히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그녀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미아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를 떠난 자신을 얼마간 미워하기도 했다. 왜 그렇게 쉽게 물러났느냐고, 왜 사랑한다며... 그의 순수한 사랑에 왜 그토록 관대하지 못했는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동시에 태오가 내뱉지 못한 말들, 감당하려 애썼던 그의 무게를 너무나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이건 그저 이별이 아니라, 함께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안타까운 선택이었다. 그래서 더 아프고 아팠다. 끝난 줄 알았던 감정이, 이 공간 속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움의 이름으로 포장된 채 미아의 마음을 나른하고 저릿하게 했다.
커다란 창 너머로 흩날리는 눈송이가 보였다. 서점 안은 따뜻했지만, 마음은 얼어붙은 채 한 겨울이었다. 책장 앞에 멈춰 선 미아는 자연스럽게 익숙한 책에 손을 뻗었다. 예전에 태오와 함께 이 자리에서 발견하고, 나란히 읽었던 그 소설이었다. 그녀는 책을 들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사랑하는 이들이 시대의 벽에 가로막혀 끝내 사랑이 이뤄지지 못하는 소설을 읽고 둘은 그 소설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날의 대화가 아직도 마음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사랑이 다가 아닐 수도 있겠네요.” 미아가 책을 덮으며 조용히 말했다.
태오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나는 오히려… 사랑이 다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세상은 그 ‘다’를 지키기엔 너무 복잡하죠.
사랑 하나만으로는 견딜 수 없는 순간순간이 있는 거랄까요.”
미아는 그때, 그 말이 어딘가 슬프다고 느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되리라는 걸, 어렴풋이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이 가장 어려운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계속 곁에 있으려면, 계속 그 사람을 믿고 따르려면, 매 순간 선택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당신은 늘 탁월한 선택을 하곤 하죠.”
태오의 말에 미아는 웃었지만, 그 웃음은 어쩐지 금방 사라졌다.
그는 사랑을 믿었지만, 그 믿음보다 더 크게 세상의 책임과 현실을 품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서점의 조용한 공간 속에서 미아는 조심스레 그 책을 펼쳤다.
낡은 페이지에서 희미하게 그날의 냄새가 났고, 언젠가 태오가 끼워놓은 책갈피가 여전히 꽂혀 있었다.
그가 좋아하던 문장, 그가 한참을 바라보던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은 때때로, 떠나는 것이 남아있는 것보다 더 큰 용기일 수 있다.”
미아는 손끝으로 그 구절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다시 읽었다.
그가 떠났던 이유,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망설였을지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녀의 안에서 억눌러두었던 감정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사랑은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었고, 상처도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와 나눈 이야기들이 그녀를 살포시 어루만져 주었다. 그건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분명 사랑의 증거였다. 함께했던 시간이, 이토록 또렷하게 마음속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징표였다.
책을 덮으며 미아는 문득 예전에 태오와 함께 읽은 또 다른 책을 떠올렸다. 미아가 가장 좋아했던, 그리고 태오에게도 한번 읽어보라고 권했던 로맨스 소설이었다. 그건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두 사람이 수없이 엇갈린 끝에, 끝내 서로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는 이야기였다. 당시 태오는 그 책의 결말을 다 읽고 나서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현실에서는 이런 결말이 드물지 않을까요?”
그 말은 마치, 마음 한 편의 바람을 감춘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미아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었다.
“그래도 어쩌면 그렇게 끝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그 하나뿐인 사랑을 믿고 싶은 거 아닐까요?
엇갈리더라도 결국 돌아오는 인연, 결국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 말이에요.”
그때는 막연한 희망이었지만, 지금은 그 말이 자신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손끝이 다시 다른 페이지 위에 멈췄다.
그 속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진짜 사랑은, 모든 오해와 시간을 지나 결국 다시 서로를 알아보는 거야.”
미아는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그 마지막 장면은 언제 읽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멀리 떨어져 있던 주인공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만나 입맞춤을 장면이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시간이 처음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던 그 장면을 다시 읽으며 미아는 문득, 아주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우리의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은 걸까. 바깥 창가로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서점 안은 여전히 따뜻하고 조용했고, 사람들의 말소리 너머로 달빛 소나타가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미아는 복잡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책장 사이를 거닐다가 문득 발길을 멈췄다.
그곳에… 그가 서 있었다. 미아는 심장이 조용히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지만...
태오였다.
처음엔 사람을 잘못 본 줄 알았다. 다시 천천히 살펴보니 분명 태오였다.
두 달 만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는 그녀를 등지고 책을 고르고 있었다. 여전히 단정한 코트 차림에 한 손엔 익숙한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미아가 선물한 핸드폰고리를 그대로 달고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미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태오…?"
무의식 중에 입에서 그의 이름이 작게 새어 나왔다.
태오는 책장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순간 그의 표정이 멈췄다.
그는 꿈꾸는 것 같았다.
그녀를 다시 만날 줄 몰랐다는 듯이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렇게 그대로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 짧은 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미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 또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미아?"
태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너무나 익숙했다.
그 한마디에, 미아의 모든 감정이 흔들렸다.
그의 눈빛 속에는 반가움과 놀라움,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태오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금 더 마른 듯했고, 이전보다 더 조용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였다.
그가 사랑했던 사람.
그토록 보고 싶던 사람.
아니,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
미아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태오는 그녀를 붙잡을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잘 지냈어요?"
미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잘 지냈냐고? 아니. 전혀.'
그럴 리가 없었다.
"네… 잘 지냈어요."
하지만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태오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을 살짝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순간,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아직도 자신을 완전히 잊지 못했다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미아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고 서둘러 서점을 나서려 했다.
그런데, 마치 운명처럼, 그 순간.
"아, 죄송합니다!"
누군가가 허둥지둥 걸어오다가 미아의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쳤고, 그녀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방이 열리며 안에 있던 책과 물건들이 온통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녀는 얼른 주우려 했지만, 누군가가 먼저 손을 뻗었다.
태오였다.
그는 그녀의 물건을 조용히 주워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에게 건네려던 순간.
그의 손이 멈췄다.
가방에서 떨어진 작은 수첩의 펼쳐진 페이지에서
'너무나 사랑하지만, 떠나야만 한다.'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적혀 있는 글귀에 순간 멈칫했다.
태오는 숨을 삼켰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물었다.
"어, 이 글… 뭐예요?"
미아는 손을 뻗어 수첩을 빼앗으려 했지만, 태오는 그것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미아."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이 말… 혹시, 내 이야기인가요?"
미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이 태오의 머릿속을 강렬하게 때렸다.
"미아" 태오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나한테서 그렇게 서둘러 도망쳤어요?"
"… 도망친 게 아니에요."
"그러면 왜 떠났어요?"
미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너무 완벽해서요."
그 말이 나오자, 태오의 눈빛이 흔들렸다.
"뭐라고요?"
"태오는… 언제나 완벽했어요. 뭐든 해결할 수 있었고, 내 문제까지도 쉽게 해결해 줬어요. 그런데 나는 그게… 너무 두려웠어요."
"두려웠다고요?"
"네. 당신과 함께할수록, 내가 점점 더 하찮고 의존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어요. 당신은 내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나는 당신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태오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미아."
그는 아주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내 곁에서 작아지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도..."
"그때 내가 잘못했어요. 나는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당신은 나 없이도 충분히 강한 사람인데, 나는 당신이 항상 내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착각했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지켜주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당신 곁에 있고 싶었어요."
미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태오는 미아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당신이 내 도움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요. 누구보다도 아주 강하고 멋진 여자죠. 하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아요."
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태오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의 맑고 순수한 눈빛이었다.
이제 그녀의 선택만이 남았다.
미아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렇지만..."
그 말이 나오자마자, 태오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를 놓아주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신은 태오가 매 순간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을 그녀의 마음속으로 들락거리는 태오의 애절한 마음을 하늘은 알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순수 그 자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었다.
꿈만 같았다. 아니. 기적 같았다.
그렇게, 운명처럼 그들은 다시 만났다.
이별 후에도, 사랑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사랑은 언제나 늘 처음처럼 그렇게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갑자기 훌훌 털고 떠나버리지 않았다. 다만, 거기에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좀처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거기에 계속 자리하고 있었는데 못 본 체했을 뿐이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어느새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저녁 하늘에서 민들레홀씨처럼 떨어지는 눈송이들은 마치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사람들은 내리는 눈송이를 보며 저마다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리고 그토록 환상적으로 흩날리는 눈꽃을 미아와 태오가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둘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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