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서울의 밤은 언제나 화려하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빌딩 불빛이 반짝이고, 가로등 불빛이 산책길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네온사인으로 물든 도심은 활기가 넘치고, 다리 위를 질주하는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길게 늘어진 선을 만들었다. 강물 위로 반짝이는 다리가 출렁인다. 한강 다리를 건너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게 그녀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미아의 눈앞은 온통 흐릿했다. 가로등 불빛이 번져 보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렴풋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지만, 그저 걸었다. 이별을 고한 순간부터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졌다. 감정을 억누르려 할수록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이별을 고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게 정말 맞는 선택일까?’
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를 사랑했다. 너무나도.
하지만, 사랑만으로는 완전하지 않았다. 아니, 거의 완벽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가 그를 충실히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그런지 자신이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그는 너무나 완벽했고, 그녀는 점점 더 초라해지는 기분 들었다.
태오와 함께할수록 자신이 점점 더 나약하고 더 의존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마치 알에서 갓 깨어난 어린 새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베푸는 사랑과 배려와 헌신이 처음엔 따뜻했지만, 점차 그것이 감당할 수 없는 짐처럼 느껴졌다. 그는 사랑이라 했지만, 미아에게는 그저 무거운 빚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빚을 지고, 그 빚을 제대로 갚을 방법이 없어서, 그래서 더 괴로웠다. 태오는 사랑이란 이유로 도와줬지만, 그걸 사랑이 아닌 책임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모든 행동이 그녀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그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결국 그 어리석은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서 떠나야만 했다.
‘그가 내게 주는 모든 것들이 너무 소중해서, 결국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미아는 힘없이 웃었다.
'자신이 이런 사람이었다니.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할 용기가 없어서 떠나버리는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니.' 스산한 거리에 연인들이 손을 맞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미아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를 떠난다는 것이, 그를 놓아버린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아파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조용히 되뇌었다.
‘태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렇다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미아는 알고 있었다.
태오는 아직도 그녀가 매몰차게 떠나던 시간을 곱씹고 있었다.
미아가 떠난 지 한참이 지났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겨우 가라앉았던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이제… 나를 놓아주세요."
그는 힘없이 웃었다.
그녀를 놓아줘야 한다.
하지만, 정말 그래야 할까?
태오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다시 한번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당신을 보호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냥… 함께하고 싶었던 거란 걸 알아줘요."
"내가 당신을 위해 한 모든 일들은…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서였어요. 그게 그렇게 부담이 됐다면 미안해요."
그의 젓은 눈빛이 흔들렸다. 마치 그의 마음처럼.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걸까? 내가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해버렸던 걸까?’
그는 미아가 처음 그에게 환하게 웃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태오 씨, 오늘 하루 정말 좋았어요!"
그녀의 해맑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의 눈빛, 그녀의 목소리, 그녀와 함께 보낸 모든 순간이 떠올랐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녀가 힘들어할 때 도와주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녀가 넘어질 때 손을 잡아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뭐든 도와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랑을 그렇게밖에 표현할 줄 몰랐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이 부담이었다고 말한다.
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미아, 난 당신이 내 곁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당신은 내 곁에 있을 때 행복하지 않았나요?'
그가 했던 모든 것들이 결국 그녀를 떠나게 만든 것이라면,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는 사랑을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나는 미아 씨가 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그녀는 아니었나.’
태오는 그녀와 있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그녀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와 언제까지나 그렇게 지내고 싶었다.
그는 다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놓아줄 수 있을까?'
'아니, 이미 그녀를 놓아버린 것이 아닐까?'
태오는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다시는 그 웃음을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그녀는 떠나갔다.
그는 테이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미아… 난 아직 사랑하는데.’
‘당신은 나를 떠나버렸어요….’
미아도 태오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자신을 자꾸만 작아지게 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사랑을 빌미로 도움을 받는 것이 부담스럽고, 자칫하면 그에게 평생 빚을 지고 사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태오를 사랑하지만, 그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떠나려 하는 행동이 자신도 우스웠다. 겁쟁이 같아 그런 자긴이 부끄러웠다.
그에게 이별을 말하고 돌아가는 길은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웠다.
밤거리는 화려한 불빛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모든 것이 안갯속을 헤매듯 흐려 보였다.
그녀는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녔다.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걸음을 멈추면 방금 있었던 장면이 영화필름처럼 머릿속에서 되살아날 것 같아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이 거리를 걸으면,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면, 아픈 감정들이 희미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걸을수록, 한걸음 한걸음 옮길수록,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것은 태오와 함께했던 순간들이었다. 구 장면 장면들이 얼마나 생생히 떠오르는지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나를 놓아주세요.'
자신이 한 말이 귓가를 때렸다.
'그 말이 정말로 맞는 말이었을까? 정말로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그녀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바지선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을 가득 채웠다.
문득, 예전에 태오와 함께했던 밤이 어느 밤이 떠올랐다. 한강 다리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함께 걸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바람이 불었다.
"미아. 추워요?"
"아니요, 괜찮아요."
"괜찮은 거 맞아요?"
"괜찮다니까요."
하지만 태오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신의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감싸주었다. 미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조용히 웃고 있었다.
"이럴 거면 왜 물어봐요."
"그냥…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때는 그가 이렇게 세심하고 따뜻한 사람이어서 행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다정함이,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미아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제 그런 기억은 그만 떠올려야 해.’
‘태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미아는 그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고, 그는 여전히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줄 테니까…
하지만, 머릿속은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졌을 때도, 동생의 유학이 어려울 것 같았을 때도…
태오는 미아의 모든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미아는 애써 외면했지만, 결국 그녀는 그에게 점점 더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편안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것이 짐처럼 느껴졌다.
그를 사랑하지만, 사랑을 이유로 받는 호의가 그녀를 점점 작아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해결사였다. 문제를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하는 동안, 그녀는 점점 더 자신을 잃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이 그동안 당차고 자신만만하게 살아온 자신을 변하게 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그렇게 해야만, 그녀는 온전히 ‘미아’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태오없이 내가 정말 온전히 남을 수 있을까?’
그 생각이, 그녀를 더 아프게 했다.
태오는 여전히 미아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때늦은 자책을 했다. 그는 그녀를 애원을 해서라도 붙잡고 싶지만, 그녀가 그를 떠난 것이 단순한 감정적인 선택이 아니라 오랫동안 깊이 고민한 결과라는 것을 알기에 쉽게 붙잡을 수도 없다.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이 와닿지 않았다.
태오를 사랑하지만, 그를 떠나야 한다고 했다.
그가 그녀를 지켜주려고 했던 모든 순간이 그녀를 떠나게 했다면, 그는 대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그녀를 사랑해야 했을까?
그녀는 그의 사랑이 부담이었다고 했다.
태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과거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한 번은 미아가 감기에 심하게 걸린 날이었다.
그녀는 혼자서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태오는 저녁 늦게까지 그녀의 집 앞을 서성였다.
"태오 씨, 나 진짜 괜찮다니까요."
"아니요, 이거 받아요."
그는 그녀가 좋아하는 생강차와 죽을 사서 문 앞에 두었다.
잠깐 문을 열고 마주했을 때, 피곤한 얼굴로도 미소를 지어 보였었다.
"고마워요."
그녀의 그 미소가, 태오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가 하는 모든 것을 ‘부담’이라고 했다.
태오는 문득, 자신이 상대의 마음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더 생각하는 고집스러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그녀를 도우면서도, 그녀가 어떤 마음일지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스스로 해내는 것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녀가 점점 더 자신을 작게 느끼게 만든 것도, 결국 태오 자신이 아니었을까?
'나는 정말 당신을 사랑했어요. 미아.'
' 그래서 당신이 힘든 걸 볼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그게 당신을 떠나게 만든 거라면…'
태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떠난 뒤 모든 공간에 차디찬 공기만이 남아 맴돌고 있다.
그는 그녀를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다.
그것이 그녀를 위한 선택이라면, 그는 이제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녀 없는 그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미아가 없는 인생을 결코 선택할 수 없었다.
한순간도 그녀가 없는 삶을 떠올릴 수 없었다.
아니, 결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무조건 태오는 미아를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둘만의 사랑했던 순간을 곱씹어도 이별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토록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사랑은 구름 위로 흩어져 날아가고, 감당하기 벅찬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직,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둘 사이는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Copyright ⓒ 미아. All rights reserved.
본 브런치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는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 학습 이용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