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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 메리 골드

연재소설

by 미아




3장 ― 메리 골드




봄은 분명 왔다. 거리의 벚나무는 분홍빛을 품고, 건물 유리창에는 오후의 빛이 다이아몬드 가루처럼 부서졌다. 그러나 하린의 스튜디오 안 공기는 여전히 겨울의 냄새를 간직하고 있었다. 합판을 자를 때 배어 나오는 톱밥 냄새, 오래 켜둔 난방기에서 풍기는 건조한 바람, 오래 앉아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미세한 먼지들의 흐름이 그랬다. 그녀는 책상 위로 몸을 숙여 도면을 당겨왔다. ‘공유주거 파일럿—TYPE B’. 검은 펜으로 그은 선들은 정확했지만, 그 정확함이 오히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오차 없이 정확한 선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도면 한복판에 작은 메모를 덧붙였다. '주방 동선 50cm 확장—사람 둘이 겹치지 않게.' 늘 그랬다. 그녀가 그리는 모든 선 사이에는 누군가의 일상이 들어오도록 빈틈이 있어야 했다.


휴대폰 알림이 진동했다.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떴다. [태현]. “점심시간 잠깐 통화 괜찮아?” 그는 메시지에도 습관처럼 공손했다. 스피커폰을 켜자 뒤에서 키보드 소리와 프린터 소리가 섞여 들렸다. “담당자랑 확인했는데… 혼인신고는 필수래. 신혼부부 특별공급 기준이 신고일 기준으로 잡힌대.” 하린은 펜을 내려놓았다. “서류부터 내라는 말이네. 집은 아직 없는데.”, “그래야 ‘자격’이 생긴대.” “자격.” 그녀는 그 단어를 천천히 굴려보았다. 혀끝에 쓴맛이 맴돌았다. “사랑에 자격이라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스피커폰 너머로 종이를 넘기는 소리, 누군가 콜록이는 소리, 사무실의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렸다. 태현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난… 제도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일을 하잖아. 매일 숫자를 보고, 기준을 보고, 서명을 받지. 그래서 이런 말 하기가 더 어렵다. 그래도… 이번엔 신고부터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게 현실일지도 몰라.”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응”이라는 말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눈앞의 도면 선들이 갑자기 칼날처럼 차가워 보였다. “현실은 늘 그렇지. 그렇다고 우리가 그 현실이 되라는 건 아니잖아.”


둘은 퇴근 후 홍대 앞의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노을은 이미 건물 뒤로 기울어 있었고, 간판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카페 유리창에는 ‘수제 디저트’ 스티커가 반쯤 떨어져 있었다. 테이블은 촘촘히 배치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저마다 화면을 들여다보거나 조용히 수군거렸다. 그 사이로 커피 볶는 냄새가 무겁게 깔렸다. 바리스타가 스팀 피처를 데우는 동안 생겨난 하얀 스팀이 천천히 사라졌다. 그 김이 품고 있던 온기마저도 사라진 것처럼, 대화의 첫마디는 망설임과 함께 굳어버렸다.


“혼인신고부터 하자.” 태현이 먼저 꺼냈다. 확신이라는 단어를 가장한, 조심스러운 제안이었다. “그럼 자격이 생기고, 대출도 넓어지고, 특공도 노려볼 수 있어. 당장 큰 집은 아니더라도, 보금자리가…”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하린의 표정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천천히 커피잔을 바라보았다. 커피잔 안의 갈색 표면에서 형광등이 비늘처럼 반짝였다. “보금자리.” 그녀가 낮게 되뇌었다. “그 단어 참 따뜻해. 근데 이상하지? 그 단어를 들으면 오히려 내가 추워져.” “왜?” “보금자리는 새들이 짓잖아. 나뭇가지를 물고 와서, 자기 부리로 다듬고, 서로 등을 붙여서 말이야. 근데 우리는… 서류로 시작하네. 우리가 만든 게 아닌 집을, 우리가 만든 게 아닌 규칙으로...” 그녀는 웃었지만, 웃음 뒤에는 미세한 불안이 묻어 있었다. “참 낯설다, 사랑이 서류로 시작되는 시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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