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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텔 Jan 04. 2021

영화 아바타 배경지 ‘플리트비체’에서 노숙한 썰 푼다.

휴, 죽다 살았네.

"플리트비체!" 버스 기사 아저씨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외쳤다. 반쯤 잠들었던 우린 졸린 눈을 비비고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내렸다. 땅에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버스가 쌩- 하고 떠났다. 버스 뒤꽁무니 불빛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하하. 좀 어둡긴 하다, 그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숲속. 영화 아바타 배경지이기도 한 이곳은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다. 분명 사진으론 반짝거리는 호수와 푸르른 숲이 어우러져 아름답기 그지없었는데. 지금은 우- 우- 애꿎은 부엉이만 울어대는데 왠지 모르게 섬뜩해서 재빨리 휴대폰 지도를 켰다.


"음.. 음? 숙소까지 걸어서 세 시간 반이라는데?" 현아가 말했다. "응? 뭐라고?? 진심이야..?" 두 눈으로 스크린을 확인했다. 웬걸, 진짜였다. 나는 그때 전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오싹하다는 표현이 맞겠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는 이 시각, '걸어가면 되지' 했는데 차로 15분 찍히는 거리가 도보로는 세 시간 반이 걸리는 게 웬 말인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독일(출발) > 크로아티아 자그레브(환승) >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도착)' 루트를 밟는 것이 우리 본래 계획이었다. 독일에서 크로아티아로 넘어오는 과정에 버스 승객 하나가 여권 문제를 겪지만 않았어도 우린 분명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길어지는 입국 절차에 발을 동동 구르다 버스 기사님께 상황을 여쭤봤을 때, "걱정 마~ 당근 제때 도착할 거야!" 하는 답변에 안심, 안일했던 탓이었다. 푸근한 풍채에 웃는 상의 독일 아저씨라고 곧이곧대로 믿는 게 아니었는데. 결국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고 저녁 9시 도착 예정이던 자그레브에 35분이나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예약해 둔 9시 반 환승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11시 반이 넘어야 출발하는 다음 버스를 타야 했다.



입국이 늦어진 것도, 그래서 플리트비체 버스를 놓친 것도, 그다음 버스를 타고자 몇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린 것도 분명 속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침내 도착한 플리트비체 정류장이 한 발자국 떼기도 겁나는 칠흑이라는 것과, 차는커녕 개미 한 마리 안 다님 직한 현 시각 현 좌표에서 숙소까지 무려 세 시간 반이 걸린다는 사실은 과연 죽을 맛이었다.




숙소는 포기했다. 눈앞에 겨우 보이는 현아도 잃어버릴까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마당에 도무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왼쪽 방향 위쯤에서 희미한 불빛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배낭과 캐리어를 이고 무작정 그쪽으로 향했다. 세상만사 걱정 고민은 까맣게 잊고 오로지 본능에 충실하는 순간이었다. 살고자 발버둥 치는 우리였다. 인간이 얼마나 어둠에 취약한지, 빛에 의존적인지 걸음마다 피부에 와닿았다.


불빛을 따라 도착한 곳은 아주 작고 소소한 1층짜리 우체국이었다. 'Post Office'라는 간판을 발견하기 전부터 특유의 로고와 분위기에(사무적이고, 안정적이고, 지루하지만서도 뭔가 아늑한) 단번에 우체국임을 캐치했다. 건물 앞에 모닝 한 대가 세워진 걸 보고 안에 사람이 있으리라 기대하며 창문을 마구 두들겨댔다. "Hello!! Help! Anybody there! HELLPP!!" 몇 번이고 외쳤다. 묵묵부답이었다.



우체국 은은한 불빛은 아쉽게도, 혹은 절망스럽게도 마지막 사람이 남기고 간 마감 불이었다. "일단 앉을까?" 털썩- 건물 포치(Porch)에 자릴 잡았다. 주변에 다른 숙소가 있는지, 거긴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볼 겨를 없이 일단 뭐라도 뵈는 게 있는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안 그래도 무서운데 밤이 깊어질수록 날도 추워만 갔다. 분명 7월 한여름이었지만, 캐리어를 해집어 옷이란 옷은 최대한 껴입었다. 눈으로 뒤덮인 스위스 융프라우에서 입으려고 챙겨온 유일한 긴팔 가디건도 걸쳤다. 부르르- 이가 떨렸다. 캐리어와 배낭으로 우리 주위를 둘러 세우고, 우산을 펼쳐 바람을 막고자 했다.




몰려드는 피로와 추위 속에 우린 서로 팔짱을 끼고 누웠다. 웃기는 일이지만 무교 끝판왕인 이 친구와 두 손 붙들고 기도도 했다. 우릴 지켜달라고. 살려달라고. 그래만 주면 앞으로 진짜 착하게 열심히 살겠다고. 그렇게 기도하다 지쳐 잠에 들었다. 뭐, 적어도 나는 얕은 잠에 빠졌다. 얼마가 지났을까. "야, 야.. 일어나봐, 야.." 현아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 네 시. 몸집이 커다란 한 남자가 큰 눈을 부릅뜨고 “Hello?" 하며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사람이다!!" 거무튀튀하고 두둑한 옷차림의 건장한 외국인 남성. 조심해서 나쁠 것 없는 아우라였지만 얼어 죽겠는 와중에 우릴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릴 박차고 일어났다.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대충 "우린 한국에서 왔고, 숙소 문제로 여기서 노숙을 하게 됐다, 지금 얼어 죽을 것 같다, 제발 좀 살려달라"는 식이었다. 과장 않고 이 모든 말을 10초가 안 되게 속사포처럼 뱉어냈다.


차를 끌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금방 도착한 그의 도움으로 짐을 옮겨 싣고 차에 올라탔다.(이때 사알짝 쫄았다.) 히터를 최대한으로 키워주었다.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얼어 죽겠는 와중에도 자기소개를 주고받았다. 그의 이름은 'Evan'이었다. 생명의 은인인지라 이름을 잊을 수가 없다. (후에 페이스북에서 그를 찾고자 여러 번 시도했지만 끝내 찾지는 못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는 우리가 왜 노숙을 하게 됐는지는 그닥 궁금하지 않았던 듯하다. 예의상 물어보지 않은 건지. 기억나기로 그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고,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알고, 인근 호텔 관리인으로 일했다. 바로 근처에 호텔이 있다는 말에 허탈했지만 어제로 돌아간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 확신했다. 그가 신기한 듯 전했다. "새벽 네 시, 제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원래 호텔 주변을 마지막으로 순찰하고 집으로 향해요. 사실 우체국으로 오는 이 길은 제 순찰 루트가 아니에요. 저도 여길 처음 와봤답니다. 오늘은 왜인지 여길 들리고 싶더군요. 그래서 루트를 좀 바꿔봤는데 여러분이 있었어요!"


Evan의 뜻이 'God is gracious'라는데, 우리 기도가 들어진 걸까. 차에서 한동안 몸을 녹이고는 그는 오픈 시간에 맞춰 우릴 플리트비체 정문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다. 다시 생각해도 천사가 틀림없다. 나중에 들어보니 추워 죽을 것 같은 데서 잠이 들면 그렇게 영영 죽기도 한다더라. 깊은 잠에 들려던 찰나에 적절히 등장해준 Evan 덕에 친구는 겁에 질려 날 깨웠고, 우린 살았다. 아침에 다시 본 플리트비체는 사진에서 본 것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잊을 수 없는 풍경과 추억을 선물한 애증의 플리트비체다.






(21.01.08. 기록)

어? 뭐지..? 하루아침에 브런치 조회수가 5,000을 돌파했다! 두근대는 맘으로 통계를 살펴보니 어제부터 다음 포털, 브런치 메인과 카카오톡 #탭에 내 글이 뜬 듯하다. 지금도 숫자가 계속 오르는 중. 그저 좋아서 쓰는 글인지라 내용이 일관되지도, 업로드가 꾸준하지도 못한데 이런 주목을 받으면 몹시 당황스럽고 영광스럽다..흑


왠지 모를 책임감이 생겼다. 아무래도 글과는 더더욱 사랑에 빠질 것 같다. 그 사랑을 마음껏 퍼뜨리며 성장하는 미래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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